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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방년 Jan 20. 2023

숙취

    소주 마시는 사람에게는 양주라고 하면 조니 워커를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그리고 그 시절 보통사람은 '양주 마시는 사람'이라고 하면 부자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1960년 중반 나는 소주 마시는 보통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운수 좋은 날, 부자친구 집에 갔다.  조촐한 잔치상 같은 저녁식사가 끝나자 술이 나왔다. 대단한 회사에서 대단한 직위에 있는 친구 오라버니가 내게 한 마디 했다.

    "너, 술 좀 한다더라. 나하고 내기할래?"

    "내기 좋죠. 뭘 거나요?"

    "이긴 사람이 정하기로 하자, 나중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내가 이길 거니까. 

    Blue Label, Johnnie Walker.

    엄지, 검지, 장지만으로 들었다 놓았다가 자유로왔던 소주병. 그윽한 푸른빛 Blue Label은 어깨에 힘을 주면서 양손으로 들어도 살짝 벅찼다. 오라버니가 병을 땄다. 

    나 한 잔, 너 한 잔, 너 한 잔, 나 한 잔, 부어라 마셔라, 가 반복됐다. 남은 술이 반 병이 채 못 됐을 때 목까지 벌개진 오라버니가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야, 임마, 그래, 내가 졌다."

    오라버니의 기권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신다는, 그 흔해 터진 말을 입증하고 있었다. 흐트림 없이, 곧추 앉은 채로, 묵묵히, 착실히 병을 비웠다. 

    엄청 부잣집은 화장실도 당연히 엄청 근사했다. 내 혼자 힘으로 버젓이 화장실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황홀했다. 화장실 문을 잠궜다. 


    "탈수가 너무 심각해서... 당장은, 뭐, 그냥 링겔이나 맞으면서 쉬도록 하죠." 내과 전문의 말씀이었다. 이틀 동안 누워만 지냈다, 병원 침대에서. 그러고 나서 보름 동안 씹어야 하는 음식은 못 먹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시작한 술. 그후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늘 곁에 두고 함께 해온 술. 그 동안 별별 종류의 숙취를 골고루 겪어왔지만 내 생애 최초의 숙취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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