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방년 Apr 22. 2023

쇼!쇼!쇼! (1막)

Mother Thornton & Riders to the Sea

마더 손튼(Mother Thornton*)과 상의해서 영문과 원어연극 공연작품은 싱(John Millington Synge)의 단막극 <Riders to the Sea>(바다로 가는 기사들)로 정했다. 


구호물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마더 손튼 수중에 떨어졌는지, 실은 지금도 궁금하다. 어쨌든 주인공 노모와 두 딸의 의상은 구호물자에서 추린 서양 여인네들의 헌옷으로 얼추 해결되었고 노모의 흰머리는 나의 검은 파마머리에 밀가루를 훌훌 뿌린 다음 손가락 빗질을 해주니 즉각 지저분한 백발로 변했다. 막내 아들 바틀리의 경우는 의상도 분장도 거저먹기였다.  


수많은 팝송 가사를 줄줄이 꽤고 있던 나로서는 어연간한 영어대사 암기는 모국어 암기보다 벅찰 것이 없었다. 다만 <Riders to the Sea>의 영어는 우리가 배워온 미국영어도 아니고 들어만 왔던 영국영어도 아니었던 것이 예상치 않았던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이리쉬 잉글리쉬는 학교영어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었다. 그렇다고 해서 산스크리트어도 라틴어도 아니니까 외우지 못할 것까지야 없었지만, 대충 알기는 알면서도 제대로는 알지 못하는 글의 구절들을 발화한다는 작업이 벅찼다. 처음에는 그랬다. 


작품해석이나 인물분석에 대해서는 당시 영문과에서 <셰익스피어>를 가르치셨던 마더 손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란 아일랜드의 방언인 Hiberno-English로 쓰여진 이 작품이 아이리쉬 문예부흥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사실도 배웠다. 마더 손튼의 한국어 실력이 전무후무하신 점도 우리들 영어실력 향상에 한 몫 했다. 


눈뜨고 있는 시간을 대사 암기로 채우면서 2주 정도 지내다보니 대사에 기분이,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보낸 보름 사이에 나는 어느새 시아버지, 남편, 아들 다섯을 모두 바다에 빼앗기고,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에 올라타 바다를 향하여 떠나는 막내아들 바틀리를 붙잡지 못하는 늙은 어머니 모리아가 되어 있었다. 상대역들도 동급생이 아니라 캐틀린과 노라, 나의 두 딸이었고 남장을 한 후배 역시 버젓한 막내아들로 탈바꿈을 마쳤다. 


연습은 저녁식사 시간 후 강당에서 마더 손튼의 입회(?)하에 진행되었고, 공연 연습 관람은 모든 학생에게 허용되었다. 지루한 기숙사 생활에서 무료한 저녁시간을 메우는 데 안성맞춤이었나? 듬성듬성 앉기도 하고 줄줄이 엮어 끼리끼리 앉기도 하고, 매우 편안한 자세로 각자 구경 모드를 취한 기숙생들이 강당을 채웠다.


리허설이 막바지에 들어선 어느 날 저녁, 일이 터졌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모리아에 몰입되어 열연하던 중, 문득 맨 앞줄에 앉아 있는 관객(?)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너무 재미있어하면서, 소리만 내지 않았지,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모리아가 전경자로 급변하는 순간이었다. 


저녁식사 시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전경자가 머리에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너덜너덜한 넝마를 걸치고 비장한 표정으로 눈물을 흩날리며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어로 절규하는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으리라. 


묶어 올린 밀가루 범벅 머리를 풀어헤치고, 넝마 겉옷을 벗어던지고, 손에 닿는 소품을 집어던지고… 3초 만에 무대를 개판으로 만들어 놓고, "나, 안 해!"라고 괴성을 지르면서 대여섯 개 되는 계단을 한 달음에 뛰어내려 강당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마더 손튼에게 불려갔다. 마더 손튼이 한 말씀 하셨다, 딱 한 말씀,

"초청장을 이미 다 돌렸다."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아~ 그러나 오늘까지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쇼'는 <Riders to the Sea>가 아니라 '나의 3초 광기'인 까닭은 왜일까? 



- To be continued 



*마더 손튼(Mother Thornton)은 1960년 대 중반에 성심여자대학(Sacred Heart College for Women) 영문과에서 <셰익스피어>를 가르치신, 환갑을 훌쩍 넘은 영국 수녀님이다. 수녀님과 얽힌(?)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셋만 추려서 옮긴다.  


하나 - 졸업을 앞두고 서울에서는 잠잘 데가 마땅치 않았던 상황에서, 강원도 춘천에 서양 수녀회가 작년에 설립한 여자대학이 있는데 기숙사가 있다는 희소식을 접했다. 답사 목적으로 성동역에서 경춘선 기차를 탔다. 


겨울방학 직후라서 교정 어디에서도 학생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래 그런지 봉이산 밑자락에 자리 잡은 건물의 첫인상은 '고즈넉하다'였다. 외국 어딘가에 있을법한 요양원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학교 좀 보러 왔다는 내 말에 안내실 직원은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서양 수녀님을 모셔왔다. 인터프리터가 필요하냐는 물음을 "No, thank you"로 응하자, 따라오라며 앞장 서시더니 위로, 위로 올라가셨다. 결국 옥상이 나왔다. 더럽게 추운 날씨에 몰아치는 바람도 만만찮은 속에서 Q&A가 한동안 이어졌다. 당신의 모국어로 어린 학생과 말을 섞고 있다는 사실을 흡족해 하시는 듯 싶었다. 마더 손튼이 그분 성함이었다. 


둘 - <셰익스피어> 학기말 시험에 마더 손튼은 A6 백지를 배부하신 후 칠판에 문제를 기재하셨다, 

    Do you think Hamlet’s tragedy is inner or outer? Why? 


서양사람을 마주하면 머리가 하얘지던 시절, 상대방이 "How are you?"라고 물으면 "아임파인앤뉴?" 정도의 답변만 해내도 으쓱했던 시절. 받은 백지를 백지 그대로 제출한 학생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 백지 한 장 더 달라는 학생도 있었다. 이 학생을 마더 손튼이 어찌 살갑게 반기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셋 -  담배를 피우다 사감수녀 마더 롸일리에게 적발되는 경우에는 정학을 맞는, 현모양처 양성소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서 '나 잡아봐라'는 듯이 대놓고 피워대는 나를 어느 날 마더 손튼이 부르시더니, 황량한 나날을 가르는 천상의 말씀을 한 마디 해주셨다, 

    "화재 위험이 있으니 기숙사 내에서는 흡연을 삼가고 학교 건물 뒤에서…"



앞 줄 중앙에서 오른쪽, 오른 손을 왼손 위로, 시선은 옆으로, 자세는 살짝 낮추고 계신 분 - Mother Thornton.    



이전 05화 강아지를 때리시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