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후퇴. 앞집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피난, 싫다고 하셨다. 늙은 몸뚱이 끌고 길바닥에서 허우적거리다 죽느니 속편히 집에 계시겠다면서. 베스 때문에 피난길을 서두르지 못하고 있던 우리한테는 구원의 소식이었다.
"우리 돌아올 때까지 베스 좀 봐주시겠어요? 은혜, 꼭 갚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래 주마고 하셨다.
온양 피난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날 작은오빠가 도끼를 들고 앞집으로 갔다. 기겁을 한 엄마가 뜯어 말리려고 했지만 오빠는 대문 한 짝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종아리에 피멍이 들 정도로 아버지한테 회초리 매질을 당하면서도 오빠는 끝끝내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 식구를 잡아먹은 사람, 그 집 문짝 하나 망가뜨렸다고 오빠를... 아버지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35년 후. '일가구 이주택'에 걸렸으니 집을 비워주셔야겠다는 집주인 요구에 이사를 해야만 하는 처지인데 딸아이가 막무가내였다. 동네 동무들도 없고 유치원 동무들도 없는 새 동네로 이사 가는 거, 싫단다. ‘가고 싶으면 니들이나 가라’는 식으로 막강하게 나왔다.
"이사가면 강아지 사줄게."
회유책으로 얼결에 나온 소리가 제대로 먹혔다. 이사, 빨리 가자고 성화였다.
한 달 남짓 된 요크셔 테리어. 이름은 유리. 혹시라도 누군가가 딸아이한테, "너, 엄마랑 살래 유리랑 살래?"라고 물었다면, "유리요!"가 즉각 튀어나왔을 게다.
유리 예뻐하는 일에는 남편도 한 몫 했다. 먹이고 씻기고 똥오줌 치우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고. 새끼 강아지가 먹어봤자고 싸봤자지 그게 뭐 대수라고 징징대냐는 이도 있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내가 해봐서 알고 하는 말인데, 풀타임 직업에다 (빚 갚느라고 하는) 밤샘 번역일에다 틈틈이 과외까지 하다보면....
강아지라면 어려서부터 사죽을 못쓰는 나였다. 그런데 그건 그냥 '마음이 그랬다'는 말이었나? 삶에 시달리다 보니 (바꿔 말하면 돈에 시달리다 보니) 강아지에 대한 마음은 시름시름 시들어 사라지고 육신은 강아지 대신 자기 좀 봐 달라고 툴툴거렸다.
용하다는 한의원이 초가집 지붕에서 솎아내어 말린 굼뱅이를 빻아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라기에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서 첫번 째로 누는 자신의 오줌을 마시는 게 몸에 그렇게나 좋다는 소리도 들렸다. 코를 잡고 숨을 멈추고 들이켰다.
그렇게 일상을 버텨나가는 나에게 유리 치다꺼리는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다.
베란다에는 아프리칸 바이올렛이 만발한 꽃밭이 있었다. 그런데 이 꽃밭이 시나브로 똥밭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루바닥이나 방바닥이 아니라 흙바닥에다 똥을 누겠다는 유리의 탁월한 선택의 결과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갈이 시기에 있는 보통 강아지들은 각자 취향에 맞는 대상을 골라 치열하게 갉아댄다고 들었는데, 우리 유리는 이갈이로 아프리칸 바이올렛 꽃모가지를 댕강댕강 끊어내고 있었다.
배운 게 없어서,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유리가 그런 꼴로 망가졌다고 생각한 나는 유리를 훈련시키기로 했다. 훈련의 일환으로 유리가 꽃밭에서 똥을 누는 순간을 포착하는 즉시 유리를 집어들고, 코를 똥에 대고 똥냄새를 맡게 한 다음 엉덩이를 찰싹 때려서 자신이 방금 한 일이 '매 맞을 일'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헛일이었다. 얻어 맞으면서도 유리는 계속 우리 꽃밭에서, 그러니까 자기 똥밭에서 똥을 쌌다. 엉덩이를 맞아도 등판을 맞아도 유리는 자신의 배변 습관을 고수했다. 그리고 나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저녁식사 때 일이었다. 직사각형 식탁에 의자가 넷이었다. 세 식구가 자리를 잡고 앉자 유리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다. 빈 의자 위로 폴짝 뛰어올라 자기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편과 딸아이는 껄껄 깔깔 기뻐해하였다, 신통하다면서.
나는 유리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녀석이 남편과 딸아이 빽을 믿고 보란듯이 노골적으로 나한테 도전해온 것이었다.
"야, 자식아! 니가 사람인 줄 아냐? 넌 개야!"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오른손으로 유리를 밀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어이상실한 남편의 눈초리, 원망으로 그득한 딸아이의 눈총. 바닥에서 발딱 일어선 유리는 쪼르르 딸아이한테 달려가 안겼다.
내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한 딸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끝내 입을 열고 더듬거렸다.
"엄마... 내 생각에... 유리는 지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에... 유리는 우리가 모두... 개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
유치원생한테 한 대 맞았다. 강타였다.
그해 구정, 남편과 딸아이는 미국 할머니 댁에 가고 없었다. 식탁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유리가 열린 방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가느다란, 실핏줄처럼 가늘디 가는 피가 입가에서 흘러내리고 있었고 힘에 겨운 듯이 얼굴을 조금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두 눈에는 공포와 애원이...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눈빛이 소리없이 외치고 있었다.
"나! 아파요! 너무, 너무, 아파요! 나! 죽여주세요! 나! 살려주세요!!!"
축 늘어진 유리를 품에 안고 뛰어나갔다. 대로에서 왼팔로 유리를 부둥켜안고 오른팔을 허공에 대고 마구 흔들면서 '택시!'를 불렀다. 빈 택시들이 그냥 지나쳐 가버렸다. '개를 태우면 재수없다'는 설이 왕왕 나돌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차도로 내려섰다. 서행으로 다가오는 택시를 멈춰세우고 애걸했다,
"아저씨! 따따블이요!"
상태가 심각하다, 오늘 하루 입원시키고 지켜보자, 내일 전화연락 드리겠다,는 수의사 말에 눌려 있던 눈물이 그예 터져 흘러내렸다.
다음 날 아침 전화가 왔다. 퇴계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내 울었다.
수의사가 전날 찍은 거라면서 X-ray 사진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사체를 가져가시겠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처리해드릴가요?"
딱딱해진 유리를 안고 돌아가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X-ray만 받아들고 나왔다.
집안이 온통 유리 투성이었다. 엉엉 소리까지 내가면서 울었다. 울다가 뛰쳐나갔다. 택시를 탔다. 어디고 멀리 멀리 가야 했다. 김포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하늘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려와서 그런지 공항에 떨어지자 제정신이 들었다. 어디로 가지? 어디를 가지? 아일랜드 신부님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목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 거길 가자. 신부님 성함이 맥클린치, 그것도 생각났다. 택시가 갈 수 있는 만큼 가고 나머지는 걸어서 목장에 들어섰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넓죽한 마당에서 빨래감을 다루고 있던 아일랜드 수녀님이 억양없는 우리말로 물어왔다.
"맥클린치 신부님 좀 뵈러 왔는데요…"
"아, 그러세요, 저기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곧 오실 겁니다."
맥클린치 신부님은, 물론, 초면이었다. 나를 소개하고 내가 얼마나 가슴 아픈지 왜 아픈지 주저리 주저리 읊었다. 신부님은 당신 형제분 중에 수의사가 있노라고 하시면서 강아지한테 식빵을 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다. 느닷없는 방문객에, 황당한 상황에, 당신도 모르게 뜬금없는 조언을 하신 걸 게다.
유리는 자기 생전에 식빵을 먹은 적이 없었다. 식빵을 먹어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나한테 맞아서, 내가 때려서,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서…
자기를 사랑해주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빠와 누나는 사라져 없고 똥 눌 때마다 자기한테 손찌검을 하는 무서운 엄마하고 둘이만 살아야 한다니. 그래서 유리는 마음 아파하다가 너무 아파서 피를 토하면서 떠났던 거다. 내가 유리를 때렸노라는 고백은 끝내 하지 않고 목장을 내려왔다.
바다를 마주하고 앉았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수평선만 노려보고 두어 시간을 앉아 있었다. 머얼리 수평선 너머로 앞집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