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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방년 Jun 15. 2023

쇼!쇼!쇼! (2막)

영어연극 & The Effect of Gamma Rays

인디아나 블루밍튼 주립대학교 대학원 연극학과, 1970년 가을학기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 서울에 있던 동대학원 졸업생 데일 엥거(Dale Enger) 씨의 대단한 추천서 덕에 장학금도 나왔다. 

하늘에 올라간 기분이었다. 

그 해 초여름, 연애사건과 교통사고가 겹쳐 일어났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블루밍튼 연극학 대신 텍사스 오스틴 문학박사로 졸업, 1980년에 모교 성심여자대학으로 돌아왔다. 

영문과에서 격년으로 행하는 원어연극을 지도할 때마다 남몰래 '연극앓이'를 겪었다. 

내가 서고 싶은 자리는 무대 뒤가 아니라 위였다. 




직업이 교수인 나를 배우로 쓰겠다는 극단이 있을 리 없었다. 

교수직을 떠나면 나를 단원으로 받아주겠다는 극단이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 좀 해보니 답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창단이 있었다.  

1991년 8월 10일, 용산구 구청장 날인이 찍힌 <공연자등록증>을 발급받았다. 

<공연물 종류> 난에는 '영어 연극'이 기재되었다.


영어바람이 돌풍 수준을 넘어 토네이도 급으로 급상승하고 있던 90년대, 전 국민이 영어에 환장하던 시절이었다. 그 흉흉한 바람을 타고 '영어로 연극한다'면 제법 먹힐 것 같았다. 


코리아 타임즈(’91.9.18)에는 “Sungsim Troupe to Specialize in US, UK Plays”라는 제목으로 “Professional English Drama Co. Born”이라는 기사도 떴다. 

북은 이미 두드렸으니 이제 장구를 제대로 치는 일만 남았다. 




포스터에 '후원: 미국문화원'이라고 적혀 있으면 보기에 썩 좋겠다는 생각에 미문화원 원장 필립 할리(Philip C. Harley)를 만났다. '후원 예산'은 진작에 끝났다고 한 마디로 거절했다. 돈은 됐고, '미문화원 후원'을 포스터에 넣어도 된다는 허락만 해달라고 청했다. 내키지 않아했다. 

 미국 극작가 작품을 국내에서 원어로 공연하는 일이라면 미문화원에서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안 아니겠냐는 질문에, 자기네는 여러 방면으로 문화활동을 하고 있다고 예를 들어가며 설파했다. 아~ 그러시냐, 그럼,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어떻게 설명하시겠느냐고 물었다.

결국 할리 씨는 프로그램 Sponsor’s Note에 한 말씀 했고 공연도, 물론, 관람했다.




<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감마선은 달무늬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공연작품으로 택했다. 폴 진델(Paul Zindel)이 1965년에 발표, 6년 후 퓰리처 상을 수상한 2막극이다. 


공연장은 화려하게도, 운이 무지 좋게도 <국립극장 소극장>으로 낙점되었다. 


공연 둘째 날 

웬 서양남자가 무대 뒤로 찾아와 "wonderful!”을 발사하기에, 그건 나도 아니까 나한테 하지 말고 남들에게 말해주라고 권했다. 


코리아 헤랄드(’91. 9월 말), Readers’ Forum, In My View에 그 남자 그렇게 했다:

“It just so happens that I saw ‘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 Moon Marigolds’ off-Broadway back in the 1970s. When I consider that the Songsim Troupe is made up entirely of Korea born members I believe it may be better done than what I saw in New York City. … Chun Kyung-ja was overwhelming as Beatrice. She performed magnificently. She did everything well. Her clear strong monologues were moving and inciteful. She inspired the audience as well as her fellow performers.”

'웬 서양남자'는 미국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서울에서 거주하던 폴 코트(Paul H. Cote)라는 것을 신문 보고 알았다, 무대 뒤에서는 통성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재직 중이던 안드리아 하이스 박사(Dr. Andrea Heiss)는 코리아 타임즈(91.9.27)에 이런 말씀을 남겼다 :

“The audience gets to run through an emotional roller-coaster in the course of its many scenes, but the overall effect is one of pleasure at seeing such a fine work well done. … the real lesson is that foreign plays, since they can be done so well, should be done more often.”




영어권 희곡이 한역되어 공연되는 국내 무대를 염두에 두고, 한국 희곡을 영역하여 뉴욕이나 런던 무대에 올려 보겠다는 것이 <성심극단> 창단 목표 저변에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30여 년이면 달성 가능하다고 믿었다. 근거가 부실한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근거가 부실했기에 오히려 믿음 자체는 생뚱맞게 확고했다. 

3회 공연 모두 만석이었다. 박수도 많이들 쳐주셨다.  

이 조시로 일 년에 한 작품씩 발표해 나간다면 …. 


우리는 늘 니네말 우리말로 번역해 우리집에서 공연해 왔으니 이제 우리말 니네말로 (내가) 번역해 니네집에서 공연해 보자꾸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게 나의 원대한 포부이었다. 




"누구 보라고 영어로 했대?"

"지 영어 잘한다구 자랑하나?" 

"구경 잘 했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지만."

영자신문에 실린 찬사에 들떠 있던 나에게 걸러걸러 들려온 소리다. 

원어극 공연은 국내 거주 외국인이 아니라 영어타령하는 내국인을 위한 것이었건만. 


어떤 일에 기가 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인가 보다. 

다 접었다, 다 던져버렸다. 




접어 던져버린 건 영어였지 연극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니네 보라고.'

'나, 우리말도 잘한다고.'

'무슨 말인지 하나 하나 다 알아 들으라고.'


우리말로 하기로 했다. 

일 년 후, 1992년 10월, 학전 소극장에서 그렇게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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