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골목에서 과부친구하고 과부끼리 헌책방 동업하면서 틈틈이 달러장수하던 사촌언니는 허리춤 쌈지에서 백 불짜리 한 장 꺼내 짜~악 펴서 반으로 접고 다시 한 번 더 접었다, 김포 국제공항에서 1969년에.
이륙 순간을 겨냥하면서 느긋하게 회전을 되풀이하고 있는 기장, 이륙 순간을 고대하면서 초조하게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나. 비행이 뭔지 알고 있는 사람과 비행을 비상의 유의어 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
굉음으로 시작한 이륙에 기체는 흔들흔들, 뒤뚱뒤뚱, 찔끔찔끔 위로 힘겹게 오르고 있다.
아하! 구름을 헤치면서 하늘을 멋들어지게 가로지르는 비행기가 실은 이렇게 꿈틀거리면서 난리법석을 떨면서 시작하는구나. 내가 걸어온 길과 어지간하게 비슷하다.
그날, 기내식이 뭐였지? 한식은 아니었고 일식 중식도 아니었고 얼렁뚱땅 양식이었나? 엄지 손톱보다 클랑말랑한 잼, 바둑껌 네 배 크기 사각 버터, 토스트. 그래, 양식 맞다. 토스트 네 귀퉁이까지 고르게 버터 바르고 잼을 얄팍하게 덧씌운다. 참 맛나게 먹어치웠던 것도 생각난다.
담배꽁초 냄새를 은근히 풍기는 다방 커피가 아니라서, 진짜 커피가 황홀해서 자꾸 자꾸 마셔대는 바람에 화장실을 얼마나 자주 갔던지… 일어나 우선 몸을 모로 꼬고 (덩달아 일어나 꼿꼿이 서주는 통로석 승객 덕에) 밖으로 나아가 비틀거리면서 화장실에 도달한다.
비행기도 비틀거리고 화장실도 비틀거리고 그 와중에 볼일 보느라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플라스틱 관을 세워 놓은 화장실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일을 마치고 나면 전 과정이 역으로 비틀비틀 되풀이 된다.
미국 초행길을 회상하면서 (제목까지 정해놓고) 김포국제공항에서부터 시작하려고 이륙묘사에 집중하고 있는데… '메일 도착'이 뜬다. 유형규(리드대학 중국문학) 교수님이다. 한국 현대시 중국어 번역에 나의 시 <사촌언니>를 포함하셨다는 내용이다.
'사촌언니'로 시작하고 있는 중인데 <사촌언니>가 중역되었다는 메일을 받다니, 상황이 묘하다. 이 자리를 빌어 자신에 관해 한 마디 해달라고 유형규 교수님을 매개로 전해오는 사촌언니의 부탁인가?
과부 시어머니 치하에서 6.25때 실종된 남편 기다리며 어린 두 딸 키워 시집보내고, 큰사위 사망으로 큰 딸도 과부 되어 '과부 삼대'로 지내시다가 7년 전 91세로 그냥 떠나셨다. 이제는 아시겠지? 며느리의 재가를 막기 위해 아들 전사통지를 평생 비밀로 하신 시어머니의 처사를.
한국어 <사촌언니>와 중국어 <사촌언니>를 여기 옮겨 놓는다, 사촌언니를 생각하면서.
<사촌언니>
청계천 딸라장수 사촌언니는
평생 처음 와본
공항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우물거리다
접고 또 접은 백 불 짜리를
내 손에 꼬옥 쥐어준다
뭐가 그리 서럽고 뭐가 그리 좋은지
평생 처음 와본
창공에서
주위사람 몰라라 펑펑 울면서
사촌언니를
생각한다
<我表姐〉
清溪川美金黑市裏做黃牛的表姐
在一輩子第一次來過的
機場
含着淚磨磨蹭蹭後
把摺了又摺的一百元鈔票
緊緊填在我手裏
不知為何如此悲傷如此欣然的我
在一輩子第一次來過的
蒼空
不管周圍說啥似地
哇哇大哭着想
我表姐
밥쟁반이 두어 번 더 오가고 나서, ‘이러다가 비행기 망가지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식의 환란 속에서 착륙을 겪어 낸다. 맑아 오는 정신에 휘청거리는 다리로 밟은 땅은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샌프란시스코! 이화여고 동창 친구 부친이 마침맞게 샌프란시스코 영사이셨던 덕에 그날 밤 잠자리는 제풀에 해결되고 친구 남동생 덕에 샌프란시스코 야경도 즐겼으니 참으로 화려한 미국도착이었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인디아나 블루밍튼 주립대학교, 가을학기 입학허가는 물론, 장학금도 일부 받았고 기숙사비는 전액 납부해 놓은 상태였다.
가을이 올 때까지 뉴저지 모리스타운 폐원에서 한국행으로 배정된 '미국평화봉사단원'에게 3개월 동안 한국어교사 하면서 돈을 벌었고, 또 그후 3개월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Center for Curriculum Development>에서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시청각(Audio Visual) 교수법에 의거한 어학교재 편집에 (그 목적으로 서울에서 오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수님 두 분 밑에서 보조 필진 자격으로) 참가하여 또 돈을 벌 수 있었다.
양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엄청난 벌금을 때려맞았던 박정희 휘하에서 벗어난 기념으로 담배는 양담배로 줄담배를 피워댔지만 술은 멀리하고 지냈던 덕에 평생 처음으로 수중에 늘 돈이 남아 돌았다.
완성된 교재를 사용하여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버몬트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그런데, 그곳에서, 어느날 밤.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가 근처 전봇대를 덮치면서 온 동네가 정전.
방안에서 있지도 않은 멋을 부려가면서 블레이크의 “Tiger, Tiger, Burning Bright”을 읊조리고 있던 나는 티셔츠 차림, 반바지 주머니에 몇 불 꾸겨 넣고 자전거에 올라타 폭우 속으로 달려들었다, 양초를 사오겠다는 갸륵한 생각으로.
칠흑 속에서, 쏟아붓는 빗속에서 콘크리트 언덕 내리막길은 5단 기어 자전거로는 감당이 안 되고. 그런 걸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하나? 언덕 밑에서 유유히 좌회전하면서 진입하는 스테이션 왜건을 피하려다 돌다리를 들이받고.
자전거에서 부~웅 떠서, 오른쪽으로 떨어졌으면 다리 밑 바위를 찍고 죽었을 텐데 왼쪽으로 떨어진 행운에 전봇대 보수하러 달려왔던 소방차에 실려 응급실로.
우리나라 대한나라 싫다면서 떠났던 미국 유학길은 일단 그렇게 끝나고 3년 후에야 되풀이된다.
이번에는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학교.
그곳에서도 종류별로 사고들이 있었지만 교통사고는 없이 주로 학생노릇 하면서 그럭저럭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