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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방년 Jan 31. 2023

점집에서 줌집으로

    어느 무뢰한이 내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대면서 1963년 당시 복채가 얼마였는지 대라고, 어물거리면 방아쇠를 당기겠노라고 한다 치자. 참으로 그런 놈이 나타나서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나는 앞으로 담배 피우고 포도주 마시면서 주접을 떨 수 없게 되었을 거다. 그 자리에서 총 맞아 죽었을 테니까. 

    60년 전. 곰보빵, 빠다빵 먹고 싶다 해서 빵값 달라고 손 벌릴 형편도 못되는 집안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꼼수를 써서 점집 드나들 돈을 수중에 넣었나? 사전 사야 한다고, 콘사이스 사야 한다고, 딕셔너리 사야 한다고... 그런 식으로? 


    고3 막바지 나의 고민은, '대학에 가? 마?'였다. 다소 과한 비유이긴 하지만, 'To Be or Not To Be'에 버금가는 중차대한 고민에 대해서 나는 (오빠가 둘에다 언니까지 있었지만) 일반인이 아닌 '전문가'와 상의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달에 적어도 두어 번은 하교길을 남대문으로 틀었다. 

    나의 점집순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대문 시장을 왼편에 끼고 남산길로 접어들면 왼쪽으로 점집 대여섯이 다닥다닥 줄 지어 있었다. 교복 차림에 책가방 들고 문을 들어서면 그 집이 그 집이었다. 폭이 두 자 남짓한 기차 칸 같은 내부, 가운데가 살짝 파여서 연륜을 과시하는 자그마한 소반, 던지고 던지고 다시 또 던지기를 십수년 되풀이하다 보니 가장자리가 얄팍해진 엽전 (실은 인조 11년에 만들어 숙종 4년부터 조선말기까지 통용된 상평통보). 아, 엽전 대신 생쌀을 소반 위에 흩뿌리는 집도 있었다. 


    "부모 복 없고, 남편 복 없고, 자식 복도 없는 팔자를 타고 났으며 역마살이 끼었고, 재물 복은 없으나 쓸 돈은 항상 있어."

    늘 듣는 소리다.

    동업자들끼리 합의라도 봤나?

   "남자였으면 큰 인물 될 뻔했네...."

    지겨웠다. 그러니까 여자로 태어났으니 한 생 조그맣게 살다 갈 팔자다? 팔자 좋은 년이 쪽방 점집 찾을 리는 없으니 자기한테 오는 여자한테는 누구에게나, 아무에게나 질러도 안전한 점괘다. 남자손님한테는 “여자였으면...”으로 시작하려나? 

    어쨌든 그건 내 팔자가 그렇다는 말이고, 내 앞날은? 

    "머리가 좋고 언변이 뛰어나니 학자도 좋고 정치를 해도 좋아."

    정치를 하는 데 딱히 학위가 필요할까? 그러나 해도 좋다는 학자가 되려면 대학은 기본이 아닐까? 지금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내 생각은 그랬다. 그래서 대학에 갔다, 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공부하면 학자도 될 수 있는 팔자라는 점쟁이들 말을 믿고서. 


    과부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 부지런히 점집을 찾아 다녔다. 혹시라도 새 남자가 내 팔자에 들어 있는지, 그것이 그렇게나 궁금했었다. 없다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있다면 뭐, 희망을 가지고 나름 조신하게 기다려볼 작정이었다. 못되도 여남은 집은 드나들었을 거다.

    공교롭게도 내가 접한 90년대 말 점쟁이들 역시 하나 같이 남자였다. 보다 과묵한 이들은 말을 아끼고 고개만 갸우뚱했다. 답하기가 민망하다는 뜻이렸다. 그러던 어느날 한 점쟁이가 확신에 차서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남자 95%가 당신 같은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

    "나, 한국남자 5% 필요 없어요, 딱 한 명이면 되요."

    점쟁이는 자기가 100%라고 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는 낯빛이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20년 넘게 점집에 발을 끊고 남자 없이 잘만 살아왔다. 


    2023년 1월. 

    나는 학자가 아니다. 학교도 다닐 만큼 다녔고 그러느라 공부라는 것도 할 만큼 했지만 학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점쟁이들 말을 귀담아 듣고 대학에 들어간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글을 상관하는 삶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요즈음 다시 발동이 걸렸다. 원인 제공자는 딸아이다. ('딸'은 맞는데 실은 '아이'는 아니다. 올해 마흔이니까.) 타로 카드도 제법 읽을 줄 아는 딸이 '꽤 괜찮은 선생님'을 소개받았다고 했다. 자기는 이미 '총론풀이'를 받아보고 왔다며 나도 한 번 가보기를 권했다. 

    "글쎄다… 나, 나가는 거 싫어하잖아…"

    줌으로도 가능하단다. 점집이 아니라 줌집.


    컴퓨터를 바라보며 최선생과 대화를 나누었다. 말이 좋아 대화를 '나누었다'지, 내가 20%, 최선생이 80%. 남의 말에 경청해보기가 얼마 만인가. 핵심을 정리해보자면, 딸 말 잘 듣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란다.


    나: 그런데, 나이가 들어 건강이 시원찮아져서…

    최선생: 건강은 이삼 십대보다 지금이 더 좋으실 걸요. 그때 아팠던 건 젊음으로 버틴거고. 지금이 더 건강하십니다.


    놀라워라. 1970년대 미국유학 당시, 손으로 벽을 집지 않고는 변기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던 빈혈증, 에그롤 하나도 소화시키지 못했던 악성 신경성 위장병, 밤마다 퉁퉁 부어오른 장단지, 갈비뼈에 금이 가서 들숨 날숨이 고통스러웠던 나날. 병원에도 가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삼 십대. 그 시절에 비하면 오늘 나의 칠십칠 세 건강은, 한 마디로, 좋기만 하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거야말로 누구에게나,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전세계 인구 칠십칠 세의 99%는 이삼 십대 건강상태를 그리워하고 있을 텐데.

    그래도 그렇지, 늙을 만큼 실컷 늙은 늙은이한테 “하고 싶은 건 다 하라”니.  


    나: 그런데 무슨 점이 이래요? 내일 모레 팔십인데. 지금은 새로운 걸 시작할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일들을 정리하는 시기 아닌가요?

    최선생: 그건 지극히 유교적 발상입니다. 


    점쟁이가 나이 타령을 “유교적 발상”이라고 일갈하다니. 하!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내 속을 한 번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나: 저어… 창작도 가능할까요? 글쓰기도…?

    최선생 : 물론입니다. 쓰십시요!


    십칠 세에 점집에서 들은 말에 힘을 얻어 대학입학을 결정했던 나, 칠십칠 세에 줌집에서 들은 말에 힘을 얻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점집순례는 아직 끝이 나지 않은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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