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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방년 Apr 29. 2023

미스터 할로웨이 (3) - 떠나기

    백화점 넥타이 매장에서 값비싼 미제 넥타이를 샀다. 포장지도 마련했다.

    이렇게 싸보다 찢어버리고 저렇게 싸보다 또 찢어버리고… 좁고 길죽한 넥타이 상자곽을 이리 싸보고 저리 싸보고. 실은 그게 그건데, 스물 넷에 처음 해보는 '선물포장'은 넓적한 포장지가 거덜 나기 직전에야, 약속시간이 임박했을 무렵에야 끝났다. 

    

    서둘러 제 시간에 다방에 도착했다. 미스터 할로웨이가 있는 구석 자리로 가서 맞은편에 앉았다. 

    홍차 한 잔, 커피 한 잔 주문할 때까지도 몰랐다, 넥타이를 깜빡한 사실을.


    다시 올 일 없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자리여서 그랬나? 퍽 오랫동안 마주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가?

    생각은 온통 '넥타이 생각' 뿐이었지만 끝내 언급은 하지 않았다.

    떠난다는데 서운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다. 

    커피를 다섯 잔 마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미스터 할로웨이가 환갑이 갓 넘고 나는 교수직을 시작할 즈음, 타이페이에는 미군 퇴역 장교들이 기거할 수 있는 막사가 있었다. 엉성한 바라크식으로 지어진 그 건물에서 미스터 할로웨이는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극동지역에서는 대만 기후가 자신의 건강에 최적이라면서. 


    미스터 할로웨이는 현지 여학생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무료라서 배우러 오는 학생들은 넘쳐났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재정적 지원도 서슴치 않았고 능력있는 학생이면 미국유학 뒷바라지도 마다 않았다. 대만 생활이 육신의 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미스터 할로웨이에게는 최적으로 보였다. 보기 좋았다. 


    집안 꼴은 보기 좋지 않았다. 장애 노인이 혼자 사는 경우를 본 적은 없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싶을 정도로 살림살이가 험했다. 


    미스터 할로웨이는 홍차만 마셨다. 그 옛날, 내자호텔에서도, <르네상스>에서도, 시내 다방에서도 항상 홍차다. 그러니 집에서 홍차를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홍차'가 아니라 '홍차를 넣어 마시는 컵'이었다. 표면이 밋밋하고 반질반질한 게 아니라 물결무늬로 들쭉날쭉한 15센티 높이의 플라스틱 컵. 시작은 노르께한 빛깔이었을 컵이 수 년동안 홍차 때가 덕지덕지 끼어서 보기에 역할 정도였는데… 


    모든 식기류는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이어야 한다. 왼손만 사용이 가능한 미스터 할로웨이에게 유리그릇은 금물이다, 깨뜨리는 날은 전쟁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불우한 학생에게는 학자금도 선뜻 내주면서 도대체 왜 더러운 플라스틱 컵을 버리지 않는지, 왜 컵 하나 새로 사지 않는지. 

    자기 컵은 오래 사용해서 변색됐을 뿐 전혀 더럽지 않고, 컵의 기능은 컵 색깔과는 무관하다, 뭐, 대충 그런 논조로 미스터 할로웨이는 내 불만을 묵살했다. 




    미 군정에서 주관하는 거류지에는 최장 체류기간이라는 것이 있었나? 있었겠지? 새로 들어오는 사람을 받으려면 오래 있던 사람은 떠나주어야 할 테니까. 


    미스터 할로웨이가 집같지 않은 타이페이 그 막사에서 몇 년을 살았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대만을 세 번 방문한 것, 저녁시간은 항상 진 러미(Gin Rummy)를 하면서 보낸 것, 수 년에 걸쳐 반복되는 게임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것, 체스도 가르쳐주고 싶어했지만 나는 '생각을 요하는 게임'은 질색이라서 룰만 배우고 끝낸 것, 세번 째 방문에 동반한 남편을 몹시 반겼던 것… 생각난다.




    우리만의 집을 처음으로 마련하고 남편도 한국생활에 익숙해져가고 딸아이는 초등학생이 될 무렵, 버진 아일랜드에서 편지가 왔다. 그래서 알았다, 대만을 떠났다는 것을. 


    한 장 짜리 편지는 거의 다 날씨 이야기였다. 그래도 기상청에서 보낸 편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from Bob, with avuncular love”라고 끝냈기 때문에. ('아저씨 같은'이라는 의미의 'avuncular'는 <르네상스> 시절 미스터 할로웨이한테 배운 GRE 언어영역에서나 나올 법한 수많은 단어 중 하나다.)


    사위가 어둠에 묻히면 외로운 노인이 보인다, 환영처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미스터 에구치가 전경자의 미스터 할로웨이와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연로하고 못생긴 미스터 에구치는 수면제를 먹여 재워버린 <잠자는 미녀들> 옆에 누워, '하우스 룰'을 준수하느라 미녀를 범하지는 않은 채 지난날의 연인들을 떠올린다. 

    반신불수 미스터 할로웨이는 노년에 어린 여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평생의 연인 아이린을 떠올렸을까? 




    3년에 걸쳐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받았다. 

    답장은 받은 날로 보냈다. 



    그러다가    뚝    끊겼다. 



    그래서 알았다,    떠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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