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자호텔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호텔이 아니었다. 총을 멘 군인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나 같은) 내국인은 (출입이 허용되는 미스터 할로웨이 같은) 외국인의 손님으로 보초의 오케이가 떨어져야만 출입이 가능했다.
오늘날 서울 경찰청 자리에 위치한 내자호텔은 운크라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파견원이나 군 특파원들의 국내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미스터 할로웨이는 여기에 속하지 못했다. 그의 거주지는 을지로 6가 국립중앙의료원 부근이었다. 군 감사관이란 직책이, 그러니까, 내자호텔 거주는 허락되지 않아도 1층 식당 이용 정도는 허용되는 급이었나 보다.
미스터 할로웨이하고 함께하는 내자호텔 저녁식사는 항상 티본 스테이크였다. T-Bone을 반듯하게 드러내보인 스테이크는 내 앞에, 포크로 찍어 먹기 편하도록 깍두기 크기로 썰어 놓은 스테이크는 (나이프 사용이 불가능한) 미스터 할로웨이 앞에.
중년 장애인 미국신사와 험한 분위기의 어린 한국여자 … 웨이터들은 그 두 사람 관계에 대해 어떻게 합의를 보았을까?
저녁식사 시간에는 빈 테이블이 없었지만 손님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조화로이 '사람 소리'로 잔잔하게 홀을 채울 뿐,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르네상스>가 아니어서 낮출 필요도 없고 길거리가 아니어서 높일 필요도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야기 답게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다.
미스터 할로웨이는 나에게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 흔해터진 집안 이야기도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Do you have a girlfirend?"라는 질문에는 즉각 30여년 전 아이린이 살고 있는 기억 속으로 직진, '여자친구'였던 적이 없는 아이린에 대하여,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아이린에 대하여, 평생을 품에만 넣고 살아왔던 아이린에 대하여, 천천히, 또박또박, 무심하게, 무감하게 두어 시간에 걸쳐 털어놓았다. 그날 아이린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아니다, 그 자리에 있었다.
열여섯 살 로버트 할로웨이가 어머니를 따라 이모 집에 갔던 날 거실에서 흘러나오던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는 미스터 할로웨이에게 이모 딸 아이린의 노래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피에트로 마스카니 중 어느 것이 오페라 작곡가 이름이고 어느 것이 오페라 제목인지도 몰랐지만 그 간주곡을 시작으로 미스터 할로웨이는 오페라 아리아에 빠져버렸다.
르네상스>에서 미스터 할로웨이의 단골 신청곡은 “별은 빛나건만”, “그대의 찬 손”, 기분이 썩 좋은 날에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그 많은 아리아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아리아는 헨델의 <리날도>, "Lascia Chio Pianga"였다.
미스터 할로웨이 덕에, 미스터 할로웨이가 아이린을 짝사랑한 덕에, 오페라가 낯설기만 했던 나는 멜로디로 승부해서 우뚝 솟은 유명 아리아들을 수도 없이 들었다.
미스터 할로웨이는 무섭게 가난한 집안에서 반신불수로 태어났다. 가난한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지내는 어린 아들에게 밤낮으로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아이가 글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부터는 동네 도서관에서 수시로 책을 빌려다 주었다. 덕분에 또래동무 없이도 외롭지 않은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하루에 두어 권은 기본이었다며 그 도서관에 있던 책은 아마 자기가 다 읽었을 거라며 빙긋 웃던 그 표정, 선하다.
어느날, 내가 택시를 타고 왔다는 사실에 미스터 할로웨이는 경악했다. 자신은 그 나이 되도록 택시를 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서울에서는 버스보다 전차가 (내 기억으로는 5원 정도) 저렴하기 때문에 자기는 항상 전차만 이용한다, 등등. 딱 집어서 “니 형편에 택시가 웬 말이냐”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게 핵심이었다. 그날은 <You’re stingy.>와 <I’m frugal.>이 논쟁의 주제였다.
돈으로 시간을 산다,는 의미에서 택시를 탔다는 나의 해명(?)에 미스터 할로웨이는 대놓고 코웃음 쳤다. 그러고는 “시간 강론” - 시간은 매매가 불가한 아이템이다, 내 시간이라고 해서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과 달라서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 시간이다, KJ, 너는 게으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시간과 돈, 둘 다 낭비했다. (미스터 할로웨이는 나를 KJ라고 불렀다.)
<르네상스>에서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을 틀어주던 날.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첼로 소리에 들어가 있었는데… 뇌 어느 부서에서 어떤 신호를 어디로 왜 보냈는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버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스터 할로웨이는 언제나처럼 책을 읽고 있었는데 … 보았나?
그날, <르네상스>를 나와 광화문 방향으로 함께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주고 받다가 미스터 할로웨이가 불쑥 물었다, 혹시 배우고 싶은 악기가 있느냐고.
'첼로.'
사 주겠다기에 기왕이면 좋은 걸로, 비싼 걸로 사달라는 나의 청은 즉석에서 거절당했다. 저렴한 연습용 첼로로 시작하고 적어도 일 이년 이상 꾸준히, 열심히 배우면 그때 가서 바꿔 주겠노라 했다, 레슨비는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대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첼로를 걸머지고 기숙사에서 (지름길이랍시고) 산길을 타고 저수지까지 내려가면 곧바로 첼로 선생님 댁이다. 첼로 하기 좋게 손가락이 길다는 칭찬(?)으로 시작한 레슨은 반 년을 넘기지 못했다. 레슨비는 비싸도 그만이니까 두번 째 선생님은 서울 무슨 교향악단 단원으로 모셨으나 술을 심하게 마셔댔던 그 선생님하고 헤어지는 데는 두 달도 안 걸렸다.
<콜 니드라이>를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할 생각이었는데…
<엘리자를 위하여>를 칠 수 있을 때까지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겠다고 결심했지만 바이엘도 끝내지 못했던 어린시절. 나의 첼로 레슨은 나의 피아노 레슨의 판박이로 끝났다.
2022년 12월 22일, 첼로 레슨을 다시 시작했다.
반 세기 전, 첼로 레슨을 처음 시작한 그 해 겨울, 갈색 털실로 장갑 한 켤레를 짰다, 짝짝이로.
20년 넘게 알고 지내면서 미스터 할로웨이에게 건넨 유일한 선물이었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