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칼의 눈물 25화

방울 소리 (13화)

칼의 눈물 25화

by 서기선

녀석을 만나기 위해 무리하게 산행을 해서인지 아니면 전달해야 할 내용을 무사히 잘 전달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어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던 내가 산행까지 했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질 만큼 힘들어져, 때가 되면 먹던 밥 먹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그렇게 쓰러져 꼬박 하루를 쉬었다. 하지만 피로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딸아이에 전화가 왔지만, 뻔한 안부와 틀에 박힌 인사말이 전부였으며, 무엇보다 애정 없이 의무감에 전화한 듯한 느낌마저 들어 짜증을 냈더니 도리어 왜? 화를 내냐며 자기가 더 성질을 부렸다.

평소라면 넘어갈 법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야! 내가 너 친구야? 계집애가 꼬박꼬박 반말이야. 너 그럴 거면 앞으로 전화하지 마!" 하며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잔뜩 짜증이 나 있는데 동자가 말을 걸었다.

녀석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딱히 듣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동자에게 화를 냈다.

"넌 왜! 그 녀석 이야기만 하니? 그 녀석이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만 괴롭혀!" 나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어떨 땐 냉정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주는 동자가 고맙다가도 인간의 감성은 고려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늘 아쉬웠다.

무려 80년 넘게 함께 했던 동자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내본 적 없었는데….

나의 고단함을 이해해 달라는 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자는 냉정했다.

"그 녀석이 칼을 부러뜨리지 않으면 너무 많은 사람이 죽는다고 그래도 좋아?"

"몰라! 나 피곤해 나도 죽을 만큼 힘들다고 남이야 죽든 말든 당장 내가 죽을 지경이라고."

냉정한 동자의 말이 서운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사실 녀석이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침대 오른쪽의 보조 테이블에 두었던 휴대전화를 찾아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내가 떠난 후 많은 일이 있었다며, 그간의 일을 설명하는 녀석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다치지 않았냐는 질문에 즉답을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하다 생사가 걸린 문제이니 정신 차리라는 말과 너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토닥여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생사의 기로에 선 녀석의 마음이 약해져 자칫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극한상황에 닥친 인간은 스스로 헤쳐 나가려는 습성보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일을 해결하길 바라는 나약함을 보일 때가 있다.

물론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렇다 보니 그룹 내에 있을 때 생존확률이 높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중에는 앞장서 싸우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냉정한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 생에선 그런 인간을 보진 못했다.

오래전 피난길에서 궁지에 몰리자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 때문에 녀석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냉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할머니~" 하며 칭얼거리자 나는 "왜?" 하며 단호하게 답했다.

통화가 끝나갈 무렵 녀석이 "고마웠어요" 하며 인사를 할 때, 마치 마지막 인사처럼 들려 마음이 무거웠다.

손주뻘 되는 녀석에게 생의 마지막인가를 받는 느낌이 그리 유쾌하진 않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떤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미친놈! 어디 죽으러 가냐! 잘! 해 뒤지지 말고"라는 퉁명스러운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허기가 밀려와 냉장고를 열어 신선실에 있던 오이를 끄집어내 껍질을 칼로 대충 벗겨내고 그것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밥을 먹어야 했지만 입도 마르고 구입한 지 3일이나 돼가는 오이가 아깝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 보살을 따라 산에 가기 전 해 두었던 밥이 3일이나 지나 군내가 스멀거렸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은 밥이나 먹고 다니려나? 아까 물어볼걸." 시큰둥했지만,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 허공에 읊조렸다.

그러다 뒤늦게 아들이 어둠에 잡아먹히면 죽는다던 동자의 말이 생각나 동자에게 "이제 그 녀석 어떻게 돼? 죽어?" 하고 물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아들이 어둠에 잡아먹혔으니 사방 10리의 사람들은 모두 죽을 거야!" 예상했던 대로 냉정하지만, 명확한 답을 해 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녀석을 도우라고 했어? 어차피 죽을 건데?"

"아직은 아니라고 했잖아! 만약 그 형이 칼을 부러뜨린다면 더 이상의 인명피해는 줄일 수 있으니 했던 말이야."

"그러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네!"

"그렇긴 하지만 희박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도울 방법은 없어?"

"응 간난이 네가 도울 방법은 없어!" 어릴 땐 존칭을 붙이지 않더니 어느 순간 할머니라고 불렀던 동자가 이번엔 간난이라는 이름을 붙여 말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너무나 오래간만이어서 반가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녀석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그 때문에 왜 그런 호칭을 붙였는지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는 도울 수 있다는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간난이 네가 죽어!" 예상치 못한 동자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뭐!!! 왜? 내가 왜? 죽어?"

"내가 말했잖아 진작에 죽었을 운명인데 내가 살려준 거라고. 내가 널 떠나면 넌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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