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가 잔뜩 묻어있는 나뭇잎이 바람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그저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또 십여 분이 흐른 뒤에야 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치켜들고 위쪽을 응시하다 멀리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경사가 너무 심한 탓에 걷는다기보다 기어오른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마치 짐승의 걸음처럼 사족 보행하듯 그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머리를 위쪽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의상으로 보아 나를 쫓던 경찰 같았다.
"여보세요 형사님! 정신 차리세요" 흔들어 보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경찰의 머리가 내 오른쪽으로 힘없이 기울어질 때 목 아래쪽으로 날카로운 칼자국이 보였다.
처음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칼자국 사이로 스멀스멀 혈흔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거리며, 그토록 막고자 했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시간이 없었다. 한 명의 피해자라도 줄이려면 녀석을 부러뜨려야만 한다.'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쓰러진 경찰의 소지품을 뒤져 손목의 수갑을 푸는 데 성공한 나는 가슴 안 쪽에 차고 있는 리볼버(Revolver) 권총을 오른손에 들었다.
총을 들어 올릴 때 오른손 손목에 멍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반대쪽에도 있었다.
양쪽 팔에 시퍼렇게 멍 자국이 생겼지만, 아프다는 생각보다 어떻게든 녀석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혼잣말로 읊조렸던 나는 고인이 된 경찰을 향해 "죄송합니다. 만약 내가 살아 돌아온다면, 형사님의 시신을 거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상부로 기어 올라갔다.
물론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총이 생겨서일까?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5번, 나에겐 5번의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리볼버에는 6발의 실탄을 장착할 수 있지만, 첫 번째 총알이 공포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5발의 실탄을 사용할 수 있다. 때문에, 녀석을 부러뜨리기 위해서는 5번의 기회가 생긴 셈이다….
내가 한참을 기어 올라갈 때 위쪽에서 두 번의 비명이 들렸지만, 누군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다만 위쪽이 아닌 왼쪽에서 들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무작정 위쪽으로 오르던 나는 비명이 들리던 왼쪽으로 조금 틀어서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등산로가 보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왼쪽에 있었는데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탓에 시간이 더 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비로소 등산로에 발을 디뎠을 때 어딘지 낯익은 장소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꿈에서 봤던 길이란 걸 생각해 냈다.
단지 달랐던 건 꿈속에서의 나는 칼에게 쫓기고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녀석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두 명의 등산객이 죽었던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제발 꿈이 빗나가길 바랐지만 그러지 않았다.
등산로 한복판에 두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이번엔 두려움에 떤다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어쩌면 부인하고 싶었지만 이미 예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산등선 쪽으로 고개를 들자 이제 막 그곳을 빠져나가는 칼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저쪽이면 패가 가 있는 방향인데…." 녀석이 나를 눈치채지 못했거나 아니면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지…." 막상 위치를 확인하고 나니 또다시 두려움이 밀려와 주저하고 있을 때 몸이 바르르 떨리며 잠시 한기가 들더니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렸다.
"따라가면 안 돼. 녀석을 우리 쪽으로 오도록 만들어야 해! 그러니 먼저 몸을 숨겨.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동굴이 있을 거야. 우선 그리로 가." 낯선 경험에 소름이 돋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있자니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안 가고? 여기서 그냥 죽을 거야?"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는 분명 어린아이였지만, 사용하는 어법은 마치 나이 든 어르신의 말투 같았다.
"누구야?"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계속 있으면 너 죽는다고! 빨리 가야 해!" 다급하게 말하고 있지만 단호했기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동굴이 있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저기 덤불을 들어보면 입구가 나와. 서둘러!" 목소리의 말대로 대략 5미터 전방에 마른 가지들이 수북이 쌓인 덤불이 보였고, 그것을 들추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입구가 나타났다.
하지만 막상 그곳으로 들어가려니 어딘지 모를 두려움이 밀려왔다.
멧돼지가 자주 나온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것이 있거나 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그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소리는 계속해서 다그쳤다.
"뭐 해? 얼른 안 들어가고? 빨리 들어가, 이제 곧 녀석이 올 거야!" 내가 왜 알 수 없는 목소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이 녀석이 나를 지켜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녀석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동굴 입구는 몸을 낮추고 기어들어 가야 할 정도로 협소했다.
하지만 그 안으로 조금 더 기어가자, 목을 꺾지 않고도 일어서 걸음만큼 넓고 깊은 동굴이 이어졌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동굴이 이어졌지만 구태여 들어가고 싶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 문득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목소리가 생각나 허공에 "거기 있니? 하고 물었다.
"그래 여기 있어! 그런데 너는 간난이보다 시끄럽구나!"
"간난이? 그게 누군데?"
"네가 무당 할머니라고 부르던 사람 말이다." 목소리의 말에 당황한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