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칼의 눈물 23화

칼의 눈물 (#23)

방울 소리 (11)

by 서기선

"그렇다면 조건을 만들어 주시지요" 선비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건? 어떤 조건 말인가?" 노인이 선비의 당돌함에 주춤거리며 물었다.

"당장 죽일 수 있는 왜놈 서넛이면 충분합니다." 선비가 물러섬 없이 당돌하게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당황해하며 몸을 선비 쪽으로 바짝 다가서며 나직이 말했다.

"자네! 진정 농이 아니구먼…! 어허~ 어찌 이런 일이…." 노인이 몸을 뒤로 물러서며,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경상 위 검을 집어 들며 말했다.

"설마 이 검의 끝이 우리를 향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직 우리 쪽을 베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허나 그리된다면 조처해야겠지요"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녀석을 강화도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나? 강화도라면 아직 왜놈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겠나!" 노인의 말에 생각에 잠긴 선비가 고개만 끄덕일 뿐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둘의 시선이 경상 위에 놓인 검의 눈동자로 향했다.

"왜? 이런 걸 새겨 넣었을까?"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선비가 답했다.

"소문으로는 갑진년(甲辰年)의 어느 대장장이 집에서 발견되었다는데 불에 타 죽은 자식을 안타깝게 여기던 아비가 그려 넣었다 합니다."

"그렇다면 아비를 찾아서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닌가?"

"그것이…. 누군가 집안 식구들을 모두 도륙했다 합니다."

"아니 누가? 왜?" 노인이 놀라 선비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선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저도 잘…."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이 눈물을 흘렸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를 끌고 오던 사내가 쓰러졌다.

내가 허둥지둥 정음사를 빠져나와 산 밑으로 달렸지만, 녀석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다.

산을 내달리다 입산하는 등산객을 만났지만 도망가라는 요란한 고함으로 다급함을 전해줄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혹시 산에서 멧돼지라도 만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잠시 후 벌어질 참상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칼이 나를 따라오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베어버렸지만, 누구도 이유를 알 리 없었고 달리 방법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 사실을 전해줄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포에 질려 달아나다 고르지 못한 지형 탓에 발을 헛디뎌 자빠졌지만, 아파할 겨를도 없었다.

넘어진 채로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칼이 따라오고 있었고 잔뜩 겁에 질린 채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그렇게 두 편의 꿈을 연거푸 꾸었고 마지막은 쫓기다 꿈에서 깨어났다.

과거의 일을 알려주기 위한 꿈은 간간이 꾸었지만, 미래를 암시하는 꿈은 처음이라 몹시 불안했다.

손발이 묶인 채 잠에서 일어난 건 요란한 사내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노원경찰서에서 왔습니다."

"이쪽입니다." 사내의 아들로 추측되는 목소리가 방문 밑으로 기어들어 와 나를 조롱했다.

손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무기력하게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파요 천천히 좀 가시지요" 난생처음 차본 수갑이 팔목 뼈를 때리고 있어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 함께 걷던 경찰관에게 부탁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나의 팔을 끌었다.

"아저씨 진짜로 아파서 그래요 잡아당기지 마세요" 나름 정중히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건 심한 욕설과 함께 날아온 주먹뿐이었다.

"이 자식이 뭘 잘했다고 빨리 걷기나 해! 내가 너 잡으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앞서 걷던 머리 큰 형사님의 욕설에 곁에 있던 다른 형사가 내 뒤통수를 때리며 거들었다.

"야! 조용히 가자 계속 종알거리면 끌고 간다." 두 형사의 기에 눌린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걸었다.

어젯밤 그 폐가를 지날 때였다. 앞서 걷던 머리 큰 형사가 자작나무에 묶여있는 칼을 보곤 멈춰 서서 말했다. "웬 칼을 묶어놨네? 아휴~ 그것 참! 이것도 무슨 의식 같은 건가? 아무튼 요즘 이상한 사람들 많네." 형사가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칼 쪽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건 오래된 보이는데 혹시 골동품 아냐?" 입가에 미소가 당장이라도 칼을 풀어줄 기세였다.

놀란 내가 "안돼! 풀면 안 돼요" 하고 소리쳤지만, 곁에 있던 형사가 또다시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조용히 해! 에이 형님도 딱 봐도 메이딘 차이나구먼 하하하! 나 두고 빨리 갑시다."

"그런가? 아무튼 짝퉁국 기술도 좋아!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겠지 이런 걸 누가? 묶어놨을까?"

"건들지 마세요! 제발 그냥 내려가요!" 나는 혹시라도 녀석을 풀어줄까 봐 덜컥 겁이 나 소리쳤다.

간밤에 꾼 꿈 대로라면 녀석이 풀려나는 순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이 깜짝이야! 이 자식은 아까부터 왜 이래? 야 인마! 시끄럽다고 저게 네 거라도 되냐?" 곁에 있던 형사가 멱살을 잡아끌며 말했다.

머리 큰 형사가 내 쪽을 바라보다 '잠깐만'이라고 말하자 두 형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머리 큰 형사가 확신의 눈동자를 보내고 있었지만, 곁에 있던 형사는 의문의 눈으로 깜박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경비원 칼에 목이 베였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범행도구가…. 설마!!!" 형사가 범행도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알 수 없는 공포가 몸을 감쌌다. 그것은 추측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달아나' 머릿속에서 누군가 달아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멈춰야 한다는 생각과 살아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안돼~" 하며 소리 질렀다. 허공을 울리는 내 목소리가 절규와도 같았다.

그와 동시에 곁에 있던 형사를 강하게 밀어내며, 나는 산 아래로 달렸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저 자식 잡아!" 형사들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 돌발행동에 형사들은 잠시 당황했다. 그 사이, 나는 벌써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처음 내가 달리기 시작할 때 곁에 있던 형사의 손이 나를 잡으려 허우적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양손에 찬 수갑이 때문일까 달리는 동안 여러 번 넘어질 뻔했지만, 금방 적응했다. 중학교 졸업 후 육상을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빨랐다.

"거기서~" 뒤따라오는 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쫓기는 쪽의 불안함이었을 것이다.

나의 거친 숨소리와 그의 발소리가 어우러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 뒤를 따라오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와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옅어졌다.

등산로를 벗어나 뛰고 있었기 때문에 산길은 험난했다.

뛰는 동안 나뭇가지들이 내 얼굴을 할퀴고, 간혹 도드라진 돌부리가 내 발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달렸다.

첫 의도와는 다르게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 왜 이렇게 절박한 지조차 몰랐다.

나는 단지, 계속 달리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칼 손잡이의 눈이 떠올랐다. '

멈춰야 해! 이대로라면 평생 쫓기며 살 거야!' 그런 생각이 드니 비로소 달리기를 멈출 수 있었다.

등을 돌려 뒤를 바라보니 나를 쫓던 형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선 생각 때문에 결국 되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막상 되돌아가려니 되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디가 어딘지 조차 알 수 없는 길이었지만, 분명한 건 자수하고 칼을 부러뜨려야 한다는 것과 녀석이 풀려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무작정 달아나려 했지만, 아무런 계획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두려움인지 답답함인지 알 수 없는 심장박동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수록 답답해지고 초조해져 숨조차 편히 쉬기 힘들었다.

그때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꼈다.

수갑을 차고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전화기를 꺼낼 수 있었다.

"여보세요" 903호 할머니의 전화였다.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그간의 일을 설명드렸다.

"다치진 않았니?" 오롯이 내 안부를 묻는 할머니의 짧은 물음에 왈칵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너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어"

눈물을 삼키며 "할머니!~"하고 불렀지만, 할머니는 "왜?"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

왜'라는 짧은 단어가 마치 차가운 겨울바람 같았다.

"흑흑! 하여간 멋없어! 할머니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제가 녀석을 부러뜨리든 아니면 녀석에게 죽임을 당하던 양단간에 결판은 내야 하잖아요."

"괜찮겠어?", "몰라요 어떻게든 되겠지요. 참! 그리고 고마웠어요"

"미친놈! 어디 죽으러 가냐! 잘! 해 뒤지지 말고" , "알았어요" 할머니와 통화를 마친 나는 뛰어 내려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깎아지는 듯한 길이었기에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20분가량 기어 올라갔을 때 바람에 날려온 나뭇잎에 시선이 꽂혔다.

그리고 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떨어야만 했다.

"헉 이게 뭐야!", "피…. 피잖아!"

keyword
이전 22화칼의 눈물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