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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하며 관대하고 폭력적인 국경에 대해

서은

by 동국교지 Mar 05. 2025

비정한 세계를 고발한다

  독자 모두에게 묻는다, 국경 속에 갇혀 사는 기분은 어떤가? 지구상 인류가 딛고 살 수 있는  땅 중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무주지는 사실상 없다. 세계 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도 국가가 유일하며 세계 사회의 기본단위는 국가, 최소 단위는 국민이다. 이 세계는 국민이 아닌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국에서의 생존에 좌절을 경험한 인구는 자국으로부터의 이탈과 동시에 타국으로의 편입이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국경을 넘고 국적을  전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세계지도의 국경 속에 갇혀, 국가라는 체제로부터 이탈해서는 지구의 어느 곳에서도 생존할 수 없는 기분은 참혹하다.

  국가의 배타적인 국경 통제는 민주화 세계 속 권위주의의 최후의 보루와도 같다. 이러한 경계통제는 공화주의적 관점에 의해 정당화된다. 공화주의적 국민국가는 국가 공동체에 집단적 개인 이상의 함의를 부여한다. 국가 공동체는 문화적·역사적 배경을 통해 구성된 공동선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수호하고 구성원과 연대한다. 공화주의적 국민국가는 민주정치와 사회정의가 이러한 보편적 가치를 공유해서만 실현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정식은 지금의 국가가 공화주의적 국민국가와 일치함을 통해서만 성립된다. 전쟁과 수탈, 식민지배를 바탕으로 형성된 지금의 국가가 과연 문화와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수백수천의 살생을 묵인하는 공동선과 국가 정체성은 수호할 가치가 있는가? 민주정치를 수호하기 위한 권위주의라는 것이 진정 정당한가?

  우리는 줄곧 국경이 허물어질 세계를 향한 예견을 학습하며 살아왔다. 방학마다 떠나는 해외 여행과 인터넷을 통한 타국민과의 소통은 세계화의 실현과 같이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자국으로부터 자·타의적으로 내쫓긴 난민들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한 국가의 이방인으로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이주민을 마주할 수 있었다. 국경분쟁 지역은 물론이며 땅을 공유하는 디아스포라 인구는 국경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 글은 비정한 세계를 향한 전면적 대항을 담는다. 민족주의로부터의 탈피와 인종주의의 철폐가 아닌, 지금의 세계질서는 더  이상 정당할 수 없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세계가 묵인한 국민국가의 모순 

  세계질서는 무엇을 근거로 하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원론적인 얘기부터 시작해 보자. 세계질서의 참여 주체인 국가 주권은 국민국가에 종속된 권리다. 국민국가와 국가주권이라는 개념은 근대의 정치적 흐름에 따라 등장했는데, 그 시작은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1648년 30년 전쟁의 종식을 통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주권평등의 원칙을 명시하며 국제법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진다. 이에 따르면 국가의 주권은 세계질서가 인정하는 최고 권리다. 따라서 주권은 종교와 타국의 주권을 포함한 모든 것으로부터 침범될 수 없는 배타적 권리로 정립되었다. 이후 발생한 미국의 건국은 불가침한 주권을 국가 지도자가 아닌 ‘국민’에게 부여했으며, 프랑스 혁명은 민주정치에 자유와 평등, 박애의 이념을 도입했다. 국민국가와 국가주권을 바탕으로 한 세계질서는 민주정치의 발명과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민주정치는 그 자체로 심각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 정치란 사회자산을 재분배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민주정치는 개인이 주권자로서 정치에 직접 참여함을 통해 평등하고 비폭력적인 분배를 이룩함에 의의가 있다. 즉, 민주정치는 국가를 지도자 개인의 사적 소유물이 아닌 국민의 공동 소유물임을 명시하는 정치체제다. 이를 통해 미국인은 종교와 재산, 이주의 자유를 취득하고자 했으며, 프랑스의 시민은 모든 인간이 평등할 보편적 권리를 천명하고자 했다. 국민국가의 민주정치가 갖는 모순은 이러한 민주정치의 이념과 배타적 국민 주권주의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한다.

  우선 국민국가는 ‘국민’이 지칭하는 바를 명확히 하기 위해 국경을 강화했다. 국경을 기준으로 국내에서 출생하거나 거주하는 사람은 국민이며 기본권을 지닌 인간이었으나, 국외에서 출생하거나 거주하는 사람은 침략의 가능성을 가지는 적이었다. 그렇기에 국외인의 이주를 제한하며, 국교 설정을 통해 종교의 유입을 통제했다. 또한 주권평등의 원칙의 적용 대상은 주권을 소유한 국가로 한정되며, 국가주권은 근대 국민국가에만 부여된 권리다. 이 점을 근거로 서구열강은 자의적으로 판단한 ‘전근대 국가’를 착취하며 식민제국을 건설했다. 애초부터 국경은 전쟁과 침략과 같은 비민주적 수단으로 구획되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의 탄압과 불평등은 차치하더라도, 상기한 모습의 국민국가는 결코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이러한 모순은 결코 무지로 인해 발생해 뒤늦게 발견된 것이 아니다. 그저 민주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정당화되어 왔을 뿐이다. 국민의 참정권을 바탕으로 한 대의 민주정치는 배타적 국민 주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국민국가에 의해서만 실현할 수 있었다. 모든 이익의 대변을 목적으로 하는 민주정치는 국가의 규모가 클수록 실현되기 어렵다. 이때 국민국가는 국경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참정권의 소유자를 ‘국민’으로 완전히 한정할 수 있었다. 또한 세계의 모든 인간이 어떤 국가의 국민이라면, 모든 인간이 동등하며 불가침한 주권을 지님으로써 모든 개인이 평등할 가능성 또한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논리로 상기한 국가 주권의 폭력을 정당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때 정당성을 제공했던 것이 배타적 민족주의였다. ‘민족’은 ‘국민’의 정체성으로서 국가 공동체가 보편적 공동선을 공유하고 결집하도록 했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당시 전 세계 보편의 정서였으며, 국경 밖의 ‘적’을 상정한 혐오정서였다. 국민은 적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으며, 적을 착취함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불평등하며 관대하고 폭력적인 국경에 대해

  배타적 민족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악으로 드러났으며 추후 세계시민주의에 의한 저항을 겪었다. 특히 소련의 해체와 냉전의 종식은 더 넓은 세계로의 호각을 울렸다. 많은 지식인과  대중은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사라져, 진정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한낮의 꿈이라는 사실은 지금의 세계정세가 증명한다. 러시아는 영토침탈을 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수천의 사람을 죽이고 있으며, 트럼프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제창하며 이주민과 난민을 내쫓고 있다. 자유로운 세계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 한 축 에서는 이주노동이 보편화되고 있으며, 다국적 기업이 등장하고, 세계를 무대로 하는 조직적 범죄 또한 포착되고 있다. 국경이 마냥 폐쇄적이라 평가하기도 어려운 실정인 지금, 국경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세계화는 본디 자본주의의 성장과 성공을 위한 세계 시장화의 전망이었다. 냉전이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로 마무리되자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은 국경을 가뿐히 넘었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자유로운 시장을 기반으로 한 효율적인 자본의 확대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본은 해외투자와 세계주식 시장을 통해 몸집을 불렸고, 상품의 수출입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가 발생한 것은 노동력 시장이었다. 인간은 노동력을 지닌 상품으로서 세계시장에 뛰어들었다. 인간의 노동력은 단가의 편차가 큰 품목으로, 노동임금이 높은 국가의 자본가는 노동임금이 낮은 국가의 노동자를 구매해 비용을 절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은 단순 노동력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국민주권이라는 모국에 종속된 정치적 권리를 지니는 입체적 실체기 때문이다. 즉, 노동력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권리의 이동을 동반하게 된다. 따라서 세계시장은 국민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국민’이라는 관념으로부터의 저항을 마주해야 했다. 그 결과 인간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정체성과 분리되어 단순 노동력으로 물화되어 국경을 건너게 되었다. 체류 외국인에게 제공되는 데니즌십은 사실상 인간이 아닌 인간의 노동에 부여되는 권리다. 한국 출입국관리법 시 행규칙에 따르자면 총 10개 자격으로 분류된 데니즌십은 모두 노동함을 전제로 부여되며,  정치활동은 제한되어 있다. 데니즌십을 취득하여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는 엄격한 노동의 의무를 지지만 노동법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는 없다.

  거주국에서 국민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국적 또는 시민권을 취득해야 한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오랜 기간의 노동과 거주, 높은 수준의 문화적 동일성, 생계유지 능력을 증명하는  충분한 자본, 청렴한 품행 등이 요구된다. 이는 이주민의 사회부적응을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주민의 적응은 이주국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통해 경험적으로 쌓이는 것이며, 국가는 통제가 아닌 복지를 통해 이를 유도해야 한다. 심사를 통한 국민주권의 부여는 사실상 국가가 원하는 국민을 취사선택하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가주권은 그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는 수동적이고 통제 가능한 국민을 모집하려는 목적으로 국민주권을 제공한다.  결혼이민은 바로 이런 속물적인 국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거주국민과의 혼인에 따른 결혼이민은 다수의 국가에서 국민주권 취득의 간소화가 인정된다.  혼인을 통한 가정의 형성은 곧 재생산 능력의 발생을 의미한다. 추후 국가에 기여할 생산능력의 재생산은 국가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행위다. 저출생으로 사회 괴멸의 위기에 닥친 국가가 사실상 매매혼인 국제결혼을 주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주권은 국민국가로서 질서가 흔들릴 것을 염려해 이주민에 엄격한 기준을 세운다. 동시에 국가 성장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 즉 자본과 생산 및 재생력 능력에는 환영 피켓마저 걸어주며 확보하기에 급급하다. 이는 앞서 말했던 정당한 불평등과 통제와는 다른 것이다. 국민주권의  배타성은 타국의 국민주권을 대상으로 해야만 정당하다. 자본에 따른 불평등과 자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통제는 정당하지 못하다. 또한 개방적이지도 폐쇄적이지도 못한 지금의 국경은 무국적자와 다국적자를 생산해 주권평등의 원칙 그 자체를 훼손했다. 지금의 국민 주권주의는 민주정치가 목표로 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로부터의 퇴행의 원인이며, 민족주의적 혐오를 정당화하며 디아스포라² 인구를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장치다. 즉, 세계 질서는 그 목적과 근거를 상실해 더 이상 체제를 유지할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민주적인 국경을 그리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세계질서로 향해야 할까? 일각에서는 국민국가의 경계가 흐려져 민주적 정치권력이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이 때문에 민주주의가 퇴행했다며, 민족주의적 국민국가로의 회귀를 통해 민주주의를 재건하자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 시장의 폐쇄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이주민의 완전한 노동 상품화로 주권평등의 원칙이 훼손됨은 매한가지다. 극우 정치는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정파적 기회를 얻기 위해 위와 같이 제언하고는 하지만, 위기의 주범이 자본권력과 결탁해 부정부패를 저지른 그들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지난 5세기간 줄곧 정당화에 실패했던 국가주권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세계시민주의의 낙관론 또한 수없이 한계를 마주하고는 좌절했다. 세계시민주의는 국가권력의 해체와 국제기구 연합체를 통한 지배로 평등한 세계를 제시한다. 이는 또 다른 의미의 반민주적 체제가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세계시민주의는 정치적 공동체의 범위를 세계에 거주하는 모두로 확대하며, 이들의 구심점을 보편적 이성에서 찾는다. 그러나 전 세계적 보편주의는 단순 허상에 그치지 않고 서구적 가치라는 특수성을 보편화하는 폭력으로 전도된다. 인간 보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설립된 UN이 종국에 서양 열강의 논리에 따라 흘러간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던 근대화 논리와 마찬가지로 서구적 가치에 불일치하는 이념에 계몽주의적으로 접근해 ‘보편성’을 강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문화주의 또한 같은 맥락으로 작용한다. 다문화주의는 이념과 문화, 정체성의 충돌을 특수성 사이의 것으로 한정하고, 고차원적이며 초월적인 보편주의의 통합을 통해 대립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립은 사실 각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보편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아무리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는 잔여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루소는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 “작은 땅에 울타리를 치며 ‘이 땅은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한 자는 누구냐”며 물었다. 필자 나름대로의 질문을 하자면 이렇다, 세계지도에 국경선을 그으며 국가를 천명한 자는 누구인가? 자세한 전말은 알지 못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피지배자보다는 지배자가, 민주적이기보다는 권위적으로 국가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동안의 국경은 권력에 의한 침탈과 수탈의 공간으로 권력의 분배와 같은 정치적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계는 지금에서라도 민주정치화되어야 한다. 발리바르는 경계의 민주화에 대해 관국민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세계시민주의에서 제시하는, 국민국가 해체를 전제로 한  탈국민적 시민권과는 다르다. 관국민적 시민권은 국민국가라는 정치 공동체는 인정하되, 이주민과 난민에 무차별적인 정치 참여 권리 부여를 목적으로 한다.

  이는 단순히 현재 세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시민권의 확대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세계 질서는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을 바탕으로,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디아스포라 인구를 2등 시민으로 취급한다. 발리바르는 국적에 종속된 정치적 권리, 즉 시민권을 국적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를 제안하며,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의 명증성을 분쇄하고자 한다. 그는 시민권은 민주정치와 마찬가지로 종결성이 있는 개념이 아니며, 따라서 지속적인 시도에 따라 매 순간 발명해야 할 것임을 종용한다.³ 셀리카테스는 경계 민주화의 방법론으로서 “국경에 관련된 행정절차의 투명한 공개, 사법권력의 제한적 적용, 기본권 존중” 등을 제시한다. 민주국가에서의 당연한 시민적 권리를 국경에서도 보장하기 위함이다. 이는 노동조합의 재구성과 시민사회 운동의 발전에 따라 실현 가능해진다. 범국가적 NGO와 시민단체, 정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주권만을 정치 주체로 인정하는 세계질서에, 비정부의 주체성을 부여함을 통해 국적과 분리된 시민적 권리를 기획하는 과정이다.


혐오와 폭력의 국경선 밖에서 

  인간 사회의 선은 폭력적이다. 단순히 그것이 제한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선은 제한을 표방하지만, 무엇도 제한하지 못한다. 선 안의 것은 보호되지 않으며 선으로 침입하는 모든 것을 막지도 못한다. 인간 사회의 선으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완벽히  땅과 물을, 공기를, 사람을 가로지르지 못한다. 우리는 단순히 상품일 수 없으며, 온전히 국민일 수도 없다. 국가는 인간의 몸 위에 국경을 그으며 무엇은 취하고 무엇은 제하려 하지만, 존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국경으로 나누어지는 존재가 아님에도, 전 세계를 지배하는 국경에 의해 나뉜 채로 살고 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태어난 모든 인간은 모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글은 모순에 대항해 확연히 급진적인 의견을 개진한다. 국경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을 다수의 독자에게는 비현실적인 제안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림픽에서야 회생하는 애국심이라는 단어는 이미 국민적 공감대에서 벗어났다. 필자는 혼란스러울 독자에게 본인이 그 어떤 국경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임을 상상해 보길 권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구라는 별을 지배하고 있는 기이한 세뇌에 오싹함을 느낄 것이다. 세계에는 이미 국경선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함에 그 밖을 그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세계는 이들을 불온한 아나키스트로 취급하지만,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음을, 그대들이 두려워하는 ‘아나 키즘의 혼란’이 도래하기 전에 새로운 세계를 기획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1) 국가법령정보센터, 「출입국관리법 시행령 별표 1의2」.

2) 디아스포라란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형성된 집단을 의미한다. 이민, 이주노동, 망명 등 디아스포라의 계기는 다양하며, 세계각지에서 ‘이방인’으로써 혐오의 대상이 된다.

3)  한상원, 「국민국가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발리바르의 세계정치와 관국민적 시민권 개념」,『시민과세계』 (42), pp.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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