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 민지, 민주
10월 1일, 3천여 명의 국군 장병이 광화문 일대를 메웠다. 하늘에는 전투기와 헬 기가, 땅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떼를 지어 지천을 울렸다. 무려 79억의 세금을 들인 국군의 날 기념 행사였다.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 2년 연속으로 개최된 것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제5공화국 이후로 처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또 한번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며 국군의 힘을 과시한 이 행사에 대해 “국민들께서도 우리 군의 굳건한 안보태세를 확인하고 마음을 놓으셨을 것”이라고 말했다.¹ 과연 독재정권을 연상케 하는 무장군대의 행진을 보며 국민들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까? 군대의 부조리로 연이어 사망한 군인들은 나몰라라 한 채, 3천여 명의 군인을 동원한 행진은 군대의 굳건함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를 강행한 진의는 무엇일까?
시가행진의 하이라이트는 하늘을 가르는 전투기와 함께 풍선을 타 떠오른 태극기였다. 한국전쟁에서 남한군이 북한군에 대항하여 서울을 수복한 이후 태극기를 게양한 순간을 재연한 것이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이번 행사에 대해 “국군의 전투력, 위용,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대북 억제력을 제공한다”고 말했으며, 윤석열 대통령은 기념식 모두 발언의 절반을 대북과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것에 할애했다. 그 결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소폭이나마 상승했다. 특히나 6, 70대 이상의 보수층의 결집을 이끌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분단 국가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대북 정책은 매 대선마다 후보 공약의 중심에 위치한다. 특히 보수 정당은 강경책으로, 진보 정당은 회유책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한국 정치의 불문율은 해방과 분단 이래로 권위주의 정권의 국민 결집을 위한 반 공 이데올로기와 겹쳐, 현재는 보수 정당의 지지세력 결집의 한 방식이 되었다. 즉, 10월 1일에 동원된 3천여 명의 군인, 80여 개의 장비, 79억의 세금은 모두 대북 정서를 공고히 하여 윤석열 정부의 떨어진 민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있다. 치료될 가능성조차도 보이지 않는 정치권의 부패,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권위주의화 정책, 목표로 하는 가치도 이념도 없이 서로를 헐뜯을 뿐인 양당,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적 문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향한 맹목적 복종. 이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보자. 북위 38도에 그어진 맹렬한 선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때는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영향으로 일본 제국의 최고책임자였던 천황 히로히토는 항복 의사를 밝혔다. 12년의 역사교육에 따라, 이후 한반도가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온전한 자유를 되찾지 못했다는 것 정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배워왔던 것과는 달리, 미군의 진주는 조선의 부족함으로 발생한 일도 아니었으며, 우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일본 천황의 패전 소식을 들은 한반도의 민중은 자진하여 한반도를 지배하던 왜구를 몰아냈다. 일본인이 소유하던 땅과 공장은 순리대로 원래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우리 민중은 어렵게 되찾은 자유를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국가 정상화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노동자는 공장 운영을 위해 직장 관리 자치 위원회를 만들고, 농민들은 일본인과 친일 지주의 땅을 몰수해 소작인에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수행했다. 건국준비 위원회 혹은 인민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전국가적인 정치 및 행정 체제를 세우기 위한 조직도 설립되었다. 즉, 우리 민중은 분명 통일된 한반도를 바탕으로 정상적인 국가를 운영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 진주의 목적은 흔히 알려졌던 것과 같은 국가 정상화가 아니었다. 9월 7일 발표된 맥아더 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일본 천황의 명령에 의하고 또 그를 대표하여 일본 제국 정부의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했다.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 행위 또는 공공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맥아더 사령부 포고령 제1호, 1945. 9. 7.
포고령에 따라 알 수 있듯, 미국은 한반도를 ‘점령’했으며 우리 민중의 복종을 원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가 작성한 ‘일반명령 1호’에는 북위 38도 이북 한국의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소련 극동군 사령관에게, 북위 38도 이남 한국의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미국 태평양육군 사령관에게 항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일본은 단순히 전쟁을 포기한 것이 아닌 미국과 소련에 항복한 패전국이었으며, 일본의 재산은 세계기구가 아닌 두 양강의 적산이 되었다. 중요한 점은 일본이 식민 지배시기에 쌓은 우리의 재산마저도 소련과 미국에게는 일본의 몫이었으며, 일본 패망 이후에 그들의 몫이 되었다. 이는 우리 민중의 주권을 모두 부정한 판단이었으며, 사실상 새로운 종류의 식민 지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미국의 개입은 이후 한국 정치사에 수많은 오점을 남겼다. 우리 민중은 소련과 미국의 개입에 맞서 통일된 한국을 일구고자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한 단독 선거를 강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탄압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남한 단독정부의 대통령이 된 자는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와 개헌을 서슴지 않고, 친일파 등용으로 민족정기를 해쳤으며, 민중의 민주통일 열망에 총칼을 들이밀던 이승만이었다. 남한 정부의 무소불위의 권력 뒤에는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자본이 있었다. 이는 이후 이어진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계속된 민중의 반발로 어떤 정권이 막을 내려도, 미국은 여전히 민중을 반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이끌 비민주적 대통령을 찾아 숙주를 바꿨다. 즉, 한국 정치에 군림하던 권위주의는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으로 빚어진 어쩔 수 없는 부산물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을 위해 의도된 장치였다.
남한의 권위주의는 당시 세계경제의 흐름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91년 소련의 해체를 전후로 세계는 자본주의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진영은 중심이 흔들리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기 위해 분투했으며, 반공산주의의 최전선에 있던 남한은 더더욱 경제 성장에 열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서슴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희생했다.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될 자본이 없던 남한은 외세의존적인 수출중심의 공업화를 진행했다. 그 덕에 남한의 농민과 공장주는 외국의 자본가에게 기회를 빼앗겼으며, 노동자는 값싼 임금에도 고강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국가는 숱한 반발과 노동권 투쟁을 목도하면서도 국가적 성장을 위해 희생하라는 명령으로 일관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박정희는 ‘우선은 파이를 키우기’ 위해 노동자의 자주적 노동체계 조성을 방해했다. 그 과정에서 재벌집단에 크게 의존해 그들에게 노동자를 착취할 권리를 쥐어주고, 노동자 조직과 정치적 파트너로서의 관계가 아닌 노동자 개인을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며 노동자의 탈정치화를 꾀했다. 1970년대 국가 비상사태 선언에 따른 유신체계 이후 노동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이유는 남북관계 파탄에 따른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에 있었다. 박정희는 국가보위법을 근거로 노동조합의 단체 교섭과 단체행동의 권한을 빼앗았으며, 노동조합의 권리는 주무관청과 같은 국가 행정조직에 구속되었다. 노동운동은 제한적인 공간을 파괴하며 ‘불법’행위를 지속했으며,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극한적 투쟁마저도 등장했다. 그럼에도 국가조직의 권위주의적 행보는 멈추지 않았으며, 기업 또한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원천제한하며 국가의 권위주의를 그대로 닮아갔다.³
이는 비단 독재정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1987년 민주화 이후 김영삼, 김대 중 정부에서도 여전했다. 김영삼 정부를 필두로 남한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질서를 도입했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맞닥뜨린 경제위기와 동시에 더욱 거세졌다. 김대중 정부는 복지국가로의 진전을 표명하면서도 당장 직면한 국가 부도의 위기 를 해결해야 했다. 김대중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정치의 경제 개입에서 찾았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자본에 대한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재벌기업의 규제를 완화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이후 IMF의 권고사항을 받아들이며 정리해고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 같은 노동권익에 반하는 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대중은 이러한 범국가적 위기 속에 사회안전망 개설의 일환으로 생산적 복지를 제시했다. 이는 생산에의 참여를 통한 복지를 의미하며,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저학력자, 장애인, 여성, 미성년자 등은 복지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즉,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의 목적은 빈곤해소나 불평등 완화, 교육과 의료와 같은 복지국가로의 진일보가 아닌, 시장경제 활성화 과정의 일환으로서 위기에 대응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남한의 복지는 사회적 안전망의 사용자를 생산가능 인구만으로 한정하며 노동과 생산에 복무할 것을 촉구해왔던 것이다.⁴
수십만 명의 희생으로 손에 얻은 민주국가의 권위주의적 풍토가 거세되지 못한 이유는 우리 국민의 안일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화 직후 진정한 민주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범국민적 감시는 더욱 삼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친권위주의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이유는 국민 주권의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노 동과 참정의 권리를 ‘국익’을 위해 희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희생은 안보를 목적으로 하였다. 제아무리 소련의 해체 이후 남북 관계 정상화를 위한 행보가 이어졌다 할지언정, 우리 군은 매 순간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 외쳤다. 한국전쟁의 멍에가 채 가시지 않은 우리 국민에게, 정치권은 거듭하여 북괴에 대항하여 공산주의 이념에 저항할 것을 강요했다. 우리의 삶과 정치는 여전히 반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점철되어 있다.
남한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국가와 지배세력의 이해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회적 담론과 세력의 형성을 차단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유지ㆍ재생산하기 위한 핵심적인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또한 남한사회의 지배세력은 반민족ㆍ반민주, 그리고 친일ㆍ친미가 교묘하게 결합한 반공을 지배권력 정당화의 핵심 이데올로기로 활용해왔다. 남한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분단의 결과물만은 아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식민 지배부터 존재했다. 일제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을 위해 반공을 활용했다.⁵ 해방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남한 점령과 미국에 결탁한 지배체제의 수립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한국전쟁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의 결정적 요인이다.
1) 반공 이데올로기의 부상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한 사회에 전파된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방 이후 미국이 남한에 취한 통치 방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당시 미국이 취하고 있던 제3세계 지배전략의 핵심은 반공과 반혁명이다. 반공은 사회주의권을 봉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으며, 반혁명은 제3세계의 민족적 지향을 가로막는 실제 적인 통치기제였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자신의 목적에 걸맞은 통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관료, 경찰기구, 법체계를 정비하며 식민제도와 운영관행, 일제의 인적 유산을 그대로 계승했다. 미국이 수행한 반혁명 통치의 가장 큰 수혜자는 친일 세력과 보수 우익세력이었다. 미국이 친일 보수 우익 세력에게 통치수단과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들은 미국의 권력과 정당성 부여 덕에 자신의 권력 행사에 대한 강제성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민족적ㆍ정통적 정당성까지 확보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이들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자신들의 정통성 한계의 돌파구로 활용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반탁운동 계열과 친일파ㆍ보수 우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이승만 세력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온 반탁 구호는 민족주의자와 반민족행위자의 경계를 흐려 보이게 만들었다.
이는 친일파ㆍ보수 우익세력이 스스로를 민족 독립을 주장하는 애국자로 선전할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 이들은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는 대중들의 순수한 애국주의를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을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선전했으며,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함께 소련과 공산주의를 악마화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친일 행각은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다. 신탁통치 파동을 통해 항일과 친일의 초기 대립을 친소냐 반소냐, 친공이냐 반공이냐의 이념적 대립으로 치환되었으며,⁶ 이는 친일파와 보 수 우익 세력이 정치적으로 부활하고 그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친일세력과 보수 우익세력이 중심이 된 지배세력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정당화 수단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강력한 반공정책에 앞장섰던 지배세력은 자신의 경력을 은폐하고 좌익 민족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남한사회 지배세력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반민족ㆍ반민주, 친일ㆍ친미가 뒤엉킨 혼합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친일 경력을 미군정의 비호 아래 반공이라는 이념으로 덮어버리고, 지배를 계속하고자 했던 지배세력의 역사적 한계가 반영된 것이다.
2)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제와 내면화
미국의 지배정책과 구지배세력의 재강화는 민족적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한 피지배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46년 9월과 1948년 2월, 5월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1946년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났다. 이뿐만 아니라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기 위한 2·7 구국투쟁,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등 미국과 구지배세력의 지배를 반대하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 펼쳐졌다. 즉,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남한에서는 미국과 구지배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의 전쟁은 이념전쟁보다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민족 통일을 열망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받으려고 했던 이승만 세력의 충돌이었다. 이를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친미 세력은 그들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서슬푸른 총칼로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국가보다도 먼저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정부에 의해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되었고, 국민에서 비국민으로 전락했다.
그들의 무력탄압을 정당화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1948년 12월 1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제정된 이 법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명분으로 매우 자의적이고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국가보안법은 무자비한 국가 폭력과 경찰 독재를 정당화했고, 정권 안보와 권력 안정에 매우 기능적이었다. 국가보안법은 내란행위 자체보다 내란 유사의 ‘목적’을 가진 결사, 집단의 구성과 가입을 처벌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보안법 제 1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 1조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벌한다.
-법령정보센터, 「국가보안법」
위 조항을 통해 법률상 이 법의 문제점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특정 행위에 대한 ‘의심’만으로 혐의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법률의 실행은 ‘집행’이 아니라 ‘사냥’이 될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법 실행이 된 이듬해 194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검거된 사람만 11만 8,621명 이었다. 교도소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의 비율이 70%에 이를 정도였다. 이 법은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될 만한 이들을 간첩, 반역자로 낙인찍어 구금하거나 사형할 수 있는 탁월한 권위주의적 제도적 장치였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국민보도연맹이 1949년 6월 5일 결성됐다. 국민보도연맹의 표면적 성격은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이 조직한 반공단체’였다. 하지만 사실상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자신들의 탄압으로 지하화한 좌익조직을 색출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였다. 1949년 11월 한 달 동안 전국적인 자수기간을 두고 좌익세력의 자수 전향을 권고했으며, 보도연맹의 인원을 확충하기 위해 중앙 본부가 지방 행정 단위에 인원을 할당하기도 했다.⁷ 지속적인 협박, 회유, 동원에 의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국민보도연맹은 30만 명이 넘는 가입자를 갖게 되었으며, 이는 30만이 넘는 인원이 남한의 잠재적인 적대자로서 ‘국민 속의 비국민’으로 정부에 의해 분류·관리됨을 의미했다. 이렇게 분류된 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 약 33만 5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들은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다.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은 1950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평택 이남의 전 지역에서 수행되었으며, 그 인원은 20~25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⁸
이승만 정권은 이 학살을 ‘예방적 학살’이라고 말하며 국가 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는 입장을 취했다. 친일·우파를 중심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민족적 정통성의 부재로 인해 ‘공권력의 테러화’가 아니면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고, 폭력과 학살을 바탕으로 구축된 국가 권력 상실은 곧 자신들의 죽음을 의미했다. 남한의 이념 분단, 반공이데올로기의 내면화를 촉진했던 것은 시민사회 차원에서의 전쟁 경험, 곧 이념적 적대와 결합한 광범위한 국가의 폭력이었다. 시민의 인권을 지켜야 할 국가기구가 민간인 학살의 주체였을 때, 힘 있는 자들의 말 한마디, 손가락질 하나로 생과 사가 갈리는 것을 목격한 시민들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살아남기 위해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피지배 세력에게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념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실존의 선택이었고, 반공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3) 반공 이데올로기의 확대와 재생산
한국전쟁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는 ‘권위주의적인 국가 권력’이라는 안정적인 기반을 배경으로 확대·재생산 되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이들은 자신들의 정적, 즉 자신의 이익에 반하거나 거슬리는 사람·생각·사상·이념 등 모든 것에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말살했다. 당시 ‘공산당’ 또는 ‘빨갱이’라는 낙인은 인간의 물리적 종말을 의미했을 정도로 폭력적인 힘을 가졌다. 전후 남한 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던 것은 국가 권력과 정치 세력의 역사적 정통성 부재와 보수성, 군부의 과대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시작한 반공이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이승만 정권 이후 들어선 군부 정권의 영향이 크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내세운 것 또한 ‘반공’이었다. 박정희는『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을 벗어날 수 없다”고 언급했다.⁹ 이는 쿠데타 직후 발표된 혁명공약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총 6항의 혁명공약 중 2개의 항이 반공과 관련된다. “1. 반공을 국시의 제 1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과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의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5. 북한 공산세력을 뒤엎을 수 있는 국가의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이룩한다.”¹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반공 태세의 재정비는 쿠데타의 제 1명분이었다.
그렇기에 쿠데타 이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은 반공 체제를 정비했다. 1961년 7월 3일 반공법 제정, 1962년 9월 12일에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강압적인 사회통제를 위한 법률적 기초를 강화하였다. 또 미국의 CIA를 본떠 만든 한국중앙정보부(KCIA)는 정권 안보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¹¹ 중앙정보부는 정보 수집, 사찰, 이데올로기 통제, 정당 정치에 대한 개입 등 총체적인 국가 운영 부분을 포괄했다. 국가 운영 부분 전반에 있어 통제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12·12 쿠데타 이후의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세력의 정당화 논리 역시 반공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와 결합한 안보론이었다. 또다시 개정된 국가보안법은 이전의 반공법 조항을 흡수해 만들어졌다. 또한 국가 운영 전반을 통제하던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만 바꿔 사회 통제를 위한 핵심조직으로 존속했다. 특히 이들이 반공과 안보론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권의 태생적 한계, 그리고 5월 광주항쟁의 유혈진압에 따른 정당성 확보 때문이었다. 남한의 역사 전반에 따르면 반공 이데올로기는 시민의 안녕을 위해 활용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저 정권의 허약한 정당성을 정당화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된 것이다. 시민들의 권리는 정권 안정을 위해 유보되었으며, 이에 대한 저항은 국가기구에 의한 직접적인 탄압으로 되돌아왔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분단체제의 공고화와 국가 권력의 유지·재생산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을 뿐 그 어떤 이념적 방향성도 지니지 못한 것이다.
더욱 조직화, 체계화, 무력화된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바라는 바다. 국가 권력이 폭력과 학살의 형태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선전할 때 시민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동의가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저항의식의 무력화와 침묵의 활성화다. 이는 지배 이데올 로기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순응 기저에 남아있던 저항의식은 시간이 흘러 지배 이데올로기가 국가 권력에 의해 제도화되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약화하고 소멸한다. 그것이 권력자가 의도한 시나리오다. ‘모든 폭력과 권위, 그리고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반공’이라는 논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저항의 필요성마저 시민적 감수성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앞선 모든 것들로부터 비롯된 권위주의는 우리 삶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은 모두 반공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아직도 권위주의가 만연하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건강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전까지 과거를 이야기했다면, 앞으로는 현재 시점에서 노동, 문화, 여성 등 여러 분야에서 분단이 낳은 모든 것을 찾아보자.
1) 감시
현시대에 권위주의는 편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감시하며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17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발급받아야 하는 주민등록증이다. 출생 당시 부여되는 고유한 번호인 주민등록번호는 평생 우리를 따라다니고, 신분증 발급을 위한 열 손가락의 지문 날인은 당연한 절차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제도는 1962년 북한 특수부대 소속 무장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서 비롯된 반공 정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공산 세력의 습격 이후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통제 및 감시 수단으로서 주민등록법의 개정을 제시했다. 피치자 전원에 대한 국가 권력의 분류는 그 자체로 독재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민등록증은 당시의 1차 개정뿐만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에서의 2차 개정을 통해 더욱 엄격해졌다. 1970년 2차 개정 때 주민등록증 발급이 의무화되었으며 주민등록증을 신분 확인 용도로 사용하도록 법제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은 성명, 성별, 생년월일, 주소, 세대주와의 관계 등을 시장, 군수 또는 구청장에게 신고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개정안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지문날인 제도도 시행되었다. 전 국민의 열 손가락 지문을 채취할 법적 근거는 전혀 없었으며, 주민등록증 발급에 사용된 지문을 경찰이 취득할 법적 근거 역시 없었다. 그럼에도 1990년부터 경찰이 지문정보전산화 작업을 하고 경찰이 임의로 이 정보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사회의 충격은 커졌다. 이에 대항한 지문날인 반대 운동은 201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문날인 거부자의 피해는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의 발급이유는 치안상 필요한 특별한 경우에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용이하게 식별, 색출하여 반공태세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어 결국에는 민주항쟁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사회안전이라는 명분으로 신분확인을 지속하고 있으나, 인터넷 서비스의 회원가입에 마저 주민등록번호가 사용되는 등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행위에 마저 간섭한다. 현재 국민에게 고유의 번호를 부여하는 나라는 8개국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자국민을 단일한 일련 번호를 통해 관리하는 나라는 세계에 대한민국밖에 없다. 세계적인 수준에서 비상식적인 통치가 현재까지 지속되는 와중에 이에 대한 비판적 사고는 ‘편의’라는 이름아래 완전히 지워졌다.
2) 노동
대한민국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생산가능인구 감소 대응을 위한 기업의 생산성 제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은 OECD 37개국 중 29위로 하위권을 기록했으며, 노동생산성 증가율 역시 둔화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그 어느 국가보다 노동에 집착하면서도 노동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예견치 못한 일은 아니다.
1998년 이뤄진 노사정위원회의 2.6 협약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시행하는 대신 사회보장 제도 개선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보장을 핵심으로 한다. 이 협약은 노동자의 기본권과 노동시장 유연성을 교환한다는 지점에서부터 불균등성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협약 이후의 대량해고와 비정규직의 급증이 증명하는 노동 기본권의 훼손은 그 이행마저도 불평등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외환위기의 배경에서 국가로부터 요구된 노동권익의 희생은 노동운동 진영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게 되어, 협상테이블에 참여하여 문제를 개선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두려움을 갖게 했다. 노동운동 측의 입장에서 이 딜레마는 비정규직법안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되풀이되었다. 정부는 이슈의 내용을 정의하는 것에서 협상의 범위와 의제를 협상의 대상으로 개방하기보다, 먼저 그러한 것들을 결정한 뒤 노조의 참여를 요구했다. 이렇듯 남한사회는 오래전부터 노동에 있어서 권위적인 태도를 지녀왔다.¹²
남한 사회의 권위주의는 노동자의 정치참여를 가로막기까지 이르렀다. 2024년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는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에 따르면 교사는 정당 가입은 커녕, 각 후보의 선거공약에 대한 의견을 표현할 수도 없다. 정치와 관련한 모든 시민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제정된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은 교원의 노동운동 및 집단행위를 금지해 교원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축소하는 교육통제를 강화했다. 이때까지 적용되던 대상은 오직 공립학교 교원뿐이었으나, 1963년 제정된 사립학교법 제52조와 제55조에 따라 그 대상에 사립학교 교원도 모두 포함되었다. 국공립·사립과 관계없이 모든 교원의 정치활동이 금지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활동 규제가 완화되어 교원노동조합의 설립이 합법화된 이후에도 교원의 정치활동 금기는 여전했다.
남한과 같이 분단 경험을 가진 독일은 남한과 달리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강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직무 외 교원의 정치활동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경우에도 같은 입법적 태도를 보인다. 미국의 경우 사회적 해악성이 큰 행위만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제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경우, 교원들의 정치활동 및 정치참여는 다른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종사자들과 동일하게 전적으로 보장돼 있다. 물론 대부분의 교원단체는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하고 있지만, 주요한 정당별로 별도의 교원연합이 있어 이들 단체는 정당별로 특정 정치의사를 지지하고 표방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결국 독일 교원들은 헌법상 위배되는 극우, 극좌 혹은 이적 단체에 가입하거나 활동하는 것을 제외하고 전적으로 정치활동이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3) 여성
뉴욕타임스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지 하루 만에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의 최고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기념됐지만, 한강 작가와 다른 여성 작가들이 대표하는 것은 여전히 뿌리 깊게 가부장적이고 종종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는 논평을 내놓았다. 남한에서 남성 중심적 문화와 권력은 정전체제라는 ‘불완전한 국가’를 빌미로 유지되고 있으며, 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권력도 국가 안보라는 틀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군사주의와 징병제가 남한 사회에서 특별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것이 유교적인 가부장 이념과 결합해 남성을 민족주체로 만들었다. 또한 남성 중심적 질서를 강화하며, 성별분업의 기본적인 구조를 유지하게 하였고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분단이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된 군사주의는 성별 간 위계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성별은 군사주의를 작동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기제이며 군사주의는 남성성, 여성성, 성별 이분법 같은 개념과 문화에 의존하는, 그 자체로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며 동시에 성별 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제도라고 설명한다. 군사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할 적과 지키는 주체, 보호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가부장 사회의 ‘보호자 남성, 피보호자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성역할은 이 세 가지 요소의 모델이 된다. 이때 군대의 존재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남성이 군대에 복무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남성다움을 검증할 수 없다고 느끼도록 해야 하고, 그들의 경험은 여성에 대한 지배와 보호, 여성들의 고마움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¹³
2022년 논란이 되었던 진명여고 위문편지 사건이 그러하다. 이 학교는 1953년부터 결연을 맺은 군부대에 1961년부터 위문편지를 보냈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위문방문과 병영캠프 체험도 진행했다. 사건 이후 학생들에 대한 무작위 신상 털기와 사진 합성이 이어졌고, 이에 더해 서울시교육청 산하 강서양천교육지 원청에서는 진명여고에 특별 장학지도를 하겠다고 밝혀 한 차례 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재학생들은 “학교에서 위문편지 가이드까지 나눠주며 강제로 시켰다. 아이들이 반발한다고 저렇게 편지를 쓴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공개한 ‘위문편지 가이드’에는 ‘학번, 성명, 주소, 전화번호 등 개인 정보 기재 금지. 개인정보를 노출시키면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재학생들의 입장이 전해진 후,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여자고등학교에서 강요하는 위문편지 금지해주세요’라는 청원이 등장했다. 청원인은 “위문편지 주의점에 ‘개인정보 노출시키면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음’이라 적혀있다. 편지 쓴 학생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편지를 써야 한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미성년자에 불과한 여학생들이 성인 남성을 위로한다는 편지를 억지로 쓰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잘 아실 것”이라고 했다.
제시한 사례는 모두 일부에 불과하다. 남한 사회의 권위주의는 사회구조의 작동원리와 다름없을 수준으로 깊고 넓게 분포되어 있다. 수십 년의 투쟁에도 민주주의는 여태까지 도래한 적 없으며,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권위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역사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한국전쟁 전후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독재정권의 권위주의적 폭력이 지금의 남한에 잔존하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3일 당시 대통령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윤석열은 야당의 탄핵 소추와 예산 삭감 현황을 나열한 종국에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고 선언했다. 반공을 내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로서 북한 공산 세력에 대한 지목과 규탄조차도 없었다. 남한 정치세력에 반공은 이런 비상식마저도 국민에게 받아들여지도록 만드는 도구다. 민주적 질서를 훼손한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광장에서 마저 국가와 언론은 중국과 북한의 공산 세력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유령처럼, 커뮤니티와 인터넷 신문을 떠돌 뿐 누구도 실존을 확인하지 못했다.
실제 군을 동원한 비상계엄이 재현된 지금 시점에서 국가의 총구를 마주할 미래도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우리는 그때, 어쩌면 국가에 의해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줄곧 ‘반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며 막연한 혐오감정을 바탕으로 국가의 논리에 복종해 왔다. 비판적 사고의 싹마저 짓밟힌 지 오래인 남한의 정치는 파탄을 지속해도 해결의 방향조차 제시하지 못한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영원히 권위주의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민주주의의 이름을 한 권위주의 정치 속에서 살 것이다. 비로소 국가권력의 암막을 스스로 걷어내야 할 때다.
1) 윤석열,「건군 제76주년 국군의 날 시가행진 격려사」,『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4.10.01.
3) 신치호,「박정희 정권하의 국가와 노동관계」,『노동연구』, 2008.10., pp.101-113
4) 윤민재,「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의 강화와 사회경제정책의 특징: 김대중 정부의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사회 21』7(3), 2016, pp.615-623구
5) 윤건차,「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지식인과 그 사상 1980~90년대」,『당대』, 2000
6) 박명림,「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 기원과 원인」, 『나남』, 1996
7) 김기진,「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부산·경남지역)」,『역사비평사』, 2002
8) 강정구,「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양태 분석」,『한울』, 2001
9) 박정희,「국가와 혁명과 나」,『지구촌』, p.35, 1997
10) 위 책, pp.36-37
11) 강정구 외 4인,「시련과 발돋움의 남북현대사」,『선인』, pp.308-309
12) 한국노동사회연구소,「민주주의와 한국의 노동」, 2013.05.17., http://klsi.org/bbs/board.php?bo_ table=B07&wr_id=978
13) 심미혜,「한국인의 성역할고정관념과 성차별의식 및 군복무에 대한 태도」,『한국심리학회지:여성』, 2013
참고문헌
강정구 외 4인,「시련과 발돋움의 남북현대사」,『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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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건차,「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지식인과 그 사상 1980~90년대」,『당대』, 2000. 윤민재,「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의 강화와 사회경제정책의 특징: 김대중 정부의 사례를 중심으로」,『인문사회 21』7(3), 2016. 한국노동사회연구소,「민주주의와 한국의 노동」, 2013.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