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4- 항일의병운동의 격전지 양평 용문산
구한말 중부지방 항일 의병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던 양근과 지평이 통합된 경기도 양평군은 곳곳에 항일 의병운동의 자취가 남아있다. 양평 용문산도 마찬가지다. 해발 1157m 용문산은 급경사에 등산로에는 돌과 바위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힘든 산이다. 악산으로 정평이 난 치악산 사다리병창 코스를 해마다 올라가는 나도 용문산 계곡 너덜길을 지날 때는 숨이 턱에 차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용문산 올라가다 보면 욕 나온대서 '욕문산'이라 부른대."
"용문산이 아니라 용문악산이네."
가쁜 숨 몰아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가는 등산객들의 대화에서 힘겹고 고통스러운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설악산 공룡능선이나 도봉산, 월악산 산행의 경험을 되살리며 올라가는 일행도 있었다. 오랜 산행으로 단련되어 그런지 일행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고 중심이 잡혀 있었다.
게릴라전에 적합했던 용문산 지형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 전국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양근, 지평, 여주, 원주, 횡성, 홍천, 평창, 영월, 제천, 충주, 장호원 등 중부지방 곳곳에도 항일 의병의 자취가 남아 있다. 각지의 의병부대는 상황에 따라 연합작전을 전개하기도 했고, 소규모로 분산되어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일본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의병부대는 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유리한 곳으로 집결했다. 산세가 험한 용문산 일대에도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양평 출신 권득수는 양주 · 양평 · 이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가산을 정리하고 병마를 구입하여 용문산을 근거지로 항전하였다. … (중략) … 권득수 부대는 서종면 문호리에서 강을 건너다 일본 헌병대와 접전하여 헌병 2명을 사살하고 후퇴하여 다시 용문산에 주둔하였다.
이언년은 의병을 모집하여 용문사에 근거지를 두고 창말 근방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하고 용문산으로 후퇴하였다. 이 의병진은 일본군이 용문산으로 들어올 것을 예상하여 백안리와 연수리 사이의 비고개에 군사를 매복하였다가 지나가는 적을 급습하여 적을 사살하고 용문산으로 후퇴하였다.
- 양평 의병운동사, 양평문화원 -
의병부대 근거지로 활용된 용문사 사찰들
용문산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전통 사찰로는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가 있다. 이 사찰들은 모두 1907년 양평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정미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우월한 일본군과 맞서기에는 열악했던 의병들은 험준하고 가파른 용문산의 지형을 활용해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의병부대는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에 식량과 무기를 보관하고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가까운 지역의 관아, 파출소, 우편소를 재빨리 공격하고 신속하게 용문산으로 후퇴했다. 험준한 용문산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유리한 지형이었다. 용문산의 지형에 익숙한 의병들은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오가며 일본군의 공세를 차단했다.
용문산을 근거로 활동하는 의병부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군은 의병부대의 근거지로 활용되고 있는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공격하고 불태워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민긍호 의병부대가 지나갔던 제천 일대 마을을 불태우고 무차별 살육을 저질렀던 만행을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에서도 자행한 것이다.
1907년 8월 24일부터 25일까지 이틀간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는 양평 일대 의병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의병 50여 명을 사살하고 상원사와 용문사를 모두 불태웠다. 이때 상원사와 용문사에 쌓여있던 다량의 식량도 함께 소각했다. 상원사와 용문사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의병 150여 명은 흩어져 용문산으로 피신했다.
10월 27에는 의병 약 150여명이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사나사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무기와 전투력이 열세였던 의병들은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어려워 많은 의병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의병들은 용문산으로 피신했다. 사나사 역시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었다.
용문산에서 느껴보는 항일 의병의 자취
마당바위 지나 깔딱 고개를 넘어 상원사에서 올라오는 삼거리에 도착하니 정상까지 980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급경사만 넘어서면 금방이라도 정상에 도착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급경사 가파른 계단이 연이어 등장한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도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다해 올라간다.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용문사, 상원사에서 밀려나 퇴각했던 의병들도 깔딱 고개를 넘었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국인 기자 메켄지는 경기도 양근에서 의병들을 만났다. 그들은 용문산을 근거로 활동하던 의병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용문산이 양근과 지평의 경계에 있었고 의병투쟁의 중요한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18세에서 26세 사이의 청년들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청년이었는데 그때까지도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초라한 누더기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가죽 장화를 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허리에는 집에서 만든 무명의 탄대가 매달려 있었고, 탄환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한 사람만이 챙 없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 밖에는 누더기를 꼬아 만든 머리띠를 매고 있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신봉룡 역주, 메켄지 저) 중에서 -
안간힘 다해 정상 가섭봉에 도착하니 용문 마을을 향해 휘감아 내려가는 거친 산줄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용문사, 상원사에서 퇴각한 의병들도 이곳에 서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았을까? 어떤 심정으로 내려다보았을까? 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서 두런두런 의병들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았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한국의 독립운동,(신봉룡 역주, 메켄지 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