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인터뷰가 장안의 화제였다. 그의 스승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단테의『신곡』이 거론되었다. 그는 모든 번역본을 읽고 또 읽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존경심, 감동과 함께 마음이 찔렸다. 명색이 등단 수필 작가라는 사람이 정식 번역본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더더구나 평소에 가장 존경하며 관심 있는 대문호의 고전을! 최근에야 일독을 마친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단테와 나의 인연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자유교양대회라는 고전 읽기 대회가 있었다. 삼국유사 등등의 고전 가운데 단테의『신곡』도 포함되었다. 아리송해서 거의 찍은 객관식 문제가 용케 들어맞고 독후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전라남도 2등을 했다. 큰언니에 의하면『신곡』독후감에 ‘나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마음먹었다’라고 쓴 것이 심사위원의 점수를 얻었을 거라는 것이다. 선정도서 가운데 불교 배경 책도 있어서 종교적 편향은 없을 터인데, 지옥의 무시무시함에 대한 일종의 솔직한 심정 표현이라면서.
전교생이 보는 운동장 조회에서 교장 선생님께 은메달을 받은 그날은 아직까지 영화 속 화면처럼 생생하다. 생애 처음 한양 나들이를 하며 덕수 초등학교에서 본선을 치렀고, 세련되고 수준 높은 서울 아이들에게 주눅이 잔뜩 들어 귀향했다.
분명 어린이용 간편 본을 읽었을 터이지만 그 후 청년 시절까지 단테의『신곡』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지냈다.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성경의 심판 이야기를 재구성한 책으로 여기면서….『돈키호테』와『오디세이』등과 마찬가지로 요약본만 읽고 그 책의 진짜 내용이나 가치를 모르고 있던 셈이다.
대학교 때 이후로는 단테의 사랑의 방식에 친밀감을 느꼈다. 그 유명한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이 제대로 이야기 한번 나눠보지 못한 짝사랑인 것에 놀라며 위로를 얻었다.
이번에『신곡』을 읽으니 신학보다는 훨씬 문학적인 책으로 다가온다. <지옥> <연옥> <천국>을 읊기 전 매번 고대 서사시 전통에 따라 뮤즈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시의 신(神) 아폴론에게까지 당신의 월계관을 받을 그릇으로 준비해 달라고 기도하니, 사도 바울이 읽는다면 깜놀할 장면이다.
그의 상상력과 창의력,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경이로웠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와 오비디우스의『변신 이야기』를 거의 외운 것 같다. 글의 곳곳에서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은 그의 열망도 느낄 수 있다. 이미 그리 되었건만….
며칠 전 임윤찬은 세계적 클래식 음반 시상식에서 한국인 처음으로 피아노 부분 그라모폰상을 받았다. 그가 한경에 밝힌 수상 소감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음악으로 접하게 된 부모님의 음성, 말투로부터 눈으로 본 풍경, 새롭게 배운 감각과 지식이 전부 나의 음악에 켜켜이 녹아 있기 때문~~"
단테에게 배워서일까? 시적인 표현이 저절로 굴러 나온다.
사랑과 문학의 기운이 똘똘 뭉쳐있는『신곡』을 다시 찬찬히 읽으며 그 부스러기 빛이라도 주워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