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가리개 여인 해프닝
『새로운 인생』을 읽고 (5)
대학 시절 같은 과 어떤 남학생에게 관심을 갖았던 때, 강의실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만큼 위험천만해 보이는 일은 없었다. 시선이 다른 애들에게 들킬 위험이 없는 먼 뒤에서야 부지런히 그 사람의 움직임을 좇는다. 하지만 고개와 시선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명확해지는 거리와 각도에 이르면 절대 그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반대 방향을 볼지언정.
단테는 베짱이 두둑했던 것 같다. 성당에서 베아트리체를 하염없이 바라봤다고 한다. 평소엔 다가가서 말도 못 붙여 봤던 겁쟁이에게 안전한 장소가 되었나 보다. 예배 보랴 틈틈이 우아한 자태를 훔쳐보랴 바빴을 것이다. 성품상 열정적으로 눈길을 주었을 터라 좋은 가문의 청년이 얼마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까? 주변을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을 단테도 그 점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문제 해결을 하고자 했다.
그녀와 나 사이의 일직선을 이루는 곳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다른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듯 한 나의 줄기찬 시선을 의아해하며 그녀는 여러 차례 나를 돌아보았다. 거기서 걸어 나올 때 내 등 뒤에 대고 사람들이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것 좀 봐. 그 여인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수척해 진거래.”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나의 눈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베아트리체 사이에 앉아 있었던 그 여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은 나의 비밀이 폭로되지 않았음을 알고 적이 안심하였다. 그리고 이 여인을 진실의 가리개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사랑을 하면 역시 바보가 되나 보다. 그 사람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할 뿐 아니라 일반적인 이성마저 무디어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척하는 것! 이 무모한 모험이 사랑나라에서는 규칙 위반의 중한 죄중의 죄임을 몰랐을까? 단테는 성당에서 자신과 베아트리체를 연결하는 사선의 중간지점에 앉은 어떤 여인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가짜로 그녀를 좋아하는 체하면서, 그 엉뚱한 여성을 위해 시까지 지어가며.
나는 그녀(진실 가리개 여인)를 이용하여 몇 년 동안 비밀을 지켰다.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심지어 그녀를 찬양하는 시 몇 편을 쓰기까지 했다.
어떤 범죄가 발각될 위기에 처할 때 범인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꾸민다. 1280년대 피렌체 시민의 입방아에 오르던 사랑의 포로도 난감해졌다. 오래 비밀을 가려준 여인이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테는 그녀를 연모한 체 한 마음이 사실인 척 이별을 슬퍼하는 소네트를 짓는다. 나중에는 이 상황도 꼬이고 (꼬일 수밖에 없으니) 모든 것이 드러날 처지가 되자 또 두 번째 진실 가리개 여인을 만든다. 베아트리체 포함 세 여성을 울리는.
공들여 파 놓은 웅덩이에 본인이 빠지듯 단테는 결국 쓰라린 값을 치르게 되었다. 유일한 생명수인 베아트리체의 인사가 끊김으로써.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치근대는 사람으로 보였을 테니 당연한 수순이다.
그녀가(베아트리체) 내가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을 때, 나의 유일한 축복인 그 달콤한 인사마저 내게 보내지 않게 되는 일이 생겨났다.---
처음 그녀가 내게 축복 내리기를 거부했을 때 나는 너무나 큰 슬픔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 곁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그 땅을 온통 비통한 눈물로 적셨다. 나는 마치 매 맞고 우는 아이처럼 ---
보이지 않는 매매를 맞고 팡팡 울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뿌린 거짓 모의(謀議)의 열매를 수습하느라 한동안 힘들었다. 베아트리체가 모든 진실을 알 수 있기 위한 발라드를 짓고, 연민을 구하는 시도 짓고, '다른 이들이 조롱하듯 그대도 나를 조롱하는 구려' 하며 한탄하는 소네트도 짓는다. 그 후 본격적으로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의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녀의 은총(인사)을 다시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음 문장에서 보듯 단테에게는 거의 생명의 양식이었건만.
그녀의 인사가 내게 얼마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녔는지? 그녀가 어느 곳에 나타나건 간에 그녀의 비 길데 없는 인사를 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내 눈에는 더 이상 나의 적들도 보이지 않았고 과거에 내게 해악을 끼쳤던 사람마저도 누구든 다 용서할 수 있을 만큼 뜨거운 자비심이 생겨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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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글씨 문장들:『새로운 인생』단테 알리기에리, 로세티. 박우수 옮김, 민음사 2005
대문의 그림 사진: BENCZÚR Gyula <Woman reading in the forest> 1875 헝가리국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