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의 인사만을 먹고살았으나
『새로운 인생』을 읽고 (4)
『새로운 인생』세 번째 페이지에서 단테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우아한 여인의 출현 이후 너무도 많은 날들이 흘러 꼭 구 년째 되던 어느 날. 이 경이로운 여인이 온통 하얀 옷을 차려입고 양옆에 좀 더 나이 많고 점잖은 부인들을 대동하고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거리를 따라 걸어가면서 그녀는 내가 마음 졸이며 서 있던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예의를 갖추며 너무나 정숙한 자태로 나에게 인사를 보냈기 때문에.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진정한 축복의 정점을 본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황홀경에 빠져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자리를 떴다.
단테가 18세 때 두 번째로 베아트리체와 해후하는 모습이다. 그저 아르노 강가에서 인사를 받은 것뿐이었지만 예의 바르고 사랑스러운 그녀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하지만 이후로 별 뾰족한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성당에서 바라보는 것과 길거리 인사가 전부였다.
다른 남자와 약혼한 상태였던 베아트리체를 사회적으로 배려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단테의 사랑 방식인 것 같다. 천상에서 내려온 것 같은 여성과 지구의 땅 위에서 어떻게 만남을 꾸려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근접 거리에 이르면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당황하여 꿀벙어리가 되고, 과도한 호르몬 분비로 창백해짐과 함께 기절해 버린다.
21세기 관점으로 보면 참으로 싱거운 짝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먹고 어떻게 살았을까? 더 나아가 추방당하여 유랑하는 기간 동안 어떻게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켰을까?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가장 큰 보답이요 양식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인생』을 읽어 가다가 모종의 단서를 발견했다.
나중에 단테는 자신의 실책으로 생명수인 인사받음 마저 끊겨, 괴로움이 극에 달하고, 그의 사랑과 초췌해짐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차린다. 이런 이상한 상황에 대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여인들도 궁금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어느 부인이 물었다.
“그 여인이 곁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면, 무슨 목적으로 당신은 그 여인을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이유를 말해 보세요.”
“부인들이여, 내가 알기로 내 사랑의 목적이자 목표는 당신들이 얘기하고 있는 그 여인의 인사를 받는 것뿐이었소. 그 인사 속에 내 모든 욕망의 목적인 축복이 깃들어 있었소. 그러나 이제 그녀가 나에게 이 축복을 주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나의 주인인 사랑의 신은 선한 마음에서 내가 확실하게 소망할 수 있는 곳에 내 모든 축복을 옮겨 놓았소.”
“청컨대 그대의 이 축복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오.”
“나의 여인을 찬양하는 말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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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는 이 고귀한 여인을 찬양하는 시(詩)만을 쓰기로 결심했다. *
이 결심대로 단테는 시를 쓰고 또 쓴다. 베아트리체의 영혼의 고귀함, 육체적인 아름다움, 그녀에 의해 야기된 사랑, 아버지를 여읜 베아트리체의 애달픔, 꿈에 본 베아트리체의 죽음, 베아트리체의 공적인 영향력, 끝내 베아트리체를 떠나보낸 슬픔, 일주기 추모시, 순례자들에게 알리는 소네트등.
그를 살린 것은 시 짓는 일이었다. 지상(地上)의 연애에 서투른 자가 어떻게 시인의 길로 접어드는지 그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얼마 후 단테는 돌연, 베아트리체에 대해 더 훌륭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아무 애기도 하지 않기로(소네트를 짓지 않기로) 결심한다. 더욱 공부하겠다는 뜻이다.
보카치오는『단테의 생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랑의 욕망이나 슬픔의 눈물, 집안의 걱정이나 공직을 통한 유혹적인 명예, 비참한 추방이나 참을 수 없는 빈궁도 그의 주된 목적 즉 신성한 공부로부터 단테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가장 혹독한 고통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가운데서도 단테는 자신의 시작(詩作)에 가장 열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신생(新生)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La vita nuova, 새로운 인생'이 베아트리체를 만남으로 인한 사랑의 발견인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그녀를 사랑하고서, 시인으로 거듭났다는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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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단테 알리기에리, 로세티. 박우수 옮김, 민음사 2005
** 보카치오의『단테의 생애』(The Earliest Lives of Dante, tr. by James Robinson Smith. 박우수 옮김. 민음사)
대문의 그림 사진: FERENCZY Károly <Orpheus> 1894 헝가리국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