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첫 부분을 읽으면 마치 단테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숨죽여서 마음 졸이며 따라가고 있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 나이다. 고학년 중에서도 낮은 학년의. 황순원의『소나기』주인공 나이쯤 되었으려나?
(『새로운 인생』두 번째 페이지에서)
그녀는 갓 아홉 살이 된 것 같고 나는 거의 아홉 살이 끝나갈 무렵에 그녀를 만났다.
그날 그녀의 의상은 매우 고귀한 색상인 은은하고 예쁜 주홍빛이었고 어린 나이에 어울리게 허리띠가 달리고 장식이 되어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서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너무나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해서 가장 미세한 혈관마저도 더불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때부터 줄곧 내 영혼과 결혼한 사랑의 신(神)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
그날 저녁 포르티나리 부인은 파티를 잘 마치고 다음과 같은 일기를 적어 나갔을 것이다.
‘오월의 공기는 청량함과 따스함으로, 정원의 장미들은 살짝 열린 봉오리와 향기로 오늘의 연회를 도왔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비체(베아트리체의 애칭)가 엄마에게 큰 힘이 되었다. 또래들의 작은 호스티스 역할을 해준 것이다. 어린이들을 환영하고, 어색하지 않게 배려하며, 놀이방으로 안내하고, 음식을 권했다. 온유한 그 아이에게 주홍빛 드레스는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신중한 성품이 의상과 장신구의 빛을 다듬어 기품 있게 해 준 듯하다.
알리기에리 씨 자제는 매부리코에, 인물이 좋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장난꾸러기 사내들 가운데서 혼자 조용히 겉도는 분위기다. 몸이 안 좋아 보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이 소년을 끌어들이기 위해 비체가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부인은 일기장을 덮으며 행사를 무사히 마침에 감사함과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린 딸에게 칭찬의 입맞춤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천재 시인으로 자랄 새끼 독수리가 다녀간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서. 위대한 문학이 태동한 역사적인 날인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서.
<1274년 5월 1일> **
램즈이어
그날 저녁 주인들은 보고를 받기 바빴다.
부유한 은행가 폴코 포르티나리는
아내의 뺨에 흡족한 키스를 하며
“당신 수고 많았소. 훌륭한 축제였지.”
“오늘 어린 비체도 한몫했어요.”
시의 신(神) 아폴론은
아홉 뮤즈의 우두머리 칼리오페의 경례를 받다.
“충성! 피렌체 비밀 작전 개시(開始)!
앞으로 반세기에 걸쳐
최고의 코메디아가 완성될 겁니다."
“오늘 발견한 소녀는 어머니보다도 우아해요.”
큐피드의 기별에 비너스의 낯빛이 변하다.
“걱정 마세요. 외모가 볼품없는 녀석에게 쐈으니까.”
“가장 날 선 순금 화살이 없어졌네.
가보(家寶)를…. 엄마 허락도 없이!”
은총을 나르고 온 천사는
하느님께 아뢰다.
“명석한 알리기에리 가문과
착한 포르티나리 가문의
아들과 딸이 인문학의 향기로
당신을 찬미하는 여정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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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단테 알리기에리, 로세티. 박우수 옮김, 민음사 2005
** 보카치오의『단테의 생애』(The Earliest Lives of Dante, tr. by James Robinson Smith. 박우수 옮김. 민음사)에서 그날이 5월 1일이라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