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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Nov 03. 2024

냇물을 움키던 소년처럼

베아트리체와의 해후/ 단테의 『신곡』 (1)

 바리톤 김동규의 <낯선 재회> 노래를 좋아한다. 그 가사와 선율이 그려내는 애잔한 스토리를 내 나름 영상화하는 재미가 있다. 카페쯤 되는 장소에서 한 남자가 저만치 있는 옛사랑을 발견한 순간일 것이다. ‘기억 속에 있나요? 오래 전의 옛 모습. 마주 잡은 우리의 손, 처음인 걸 아시나요?’하며 독백을 이어간다. 이 두 사람은 적어도 과거에 서로 사랑했었나 보다.

 『신곡』에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재회 장면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또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건만 호기심이 일었다. 작가에게 자신의 픽션 등장인물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고 하고, 또 단테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베아트리체와의 해후이기 때문이다. 그는 3이나 9 숫자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는데,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세 번째 만남이 된다. 아마도 이 부분을 쓰면서 많은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고 마음이 두근두근했을 것이다. 지옥과 연옥을 인도하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연옥의 끝 부분에서 베아트리체와 바통 터치를 한다.

 

 1. 베아트리체가 신부처럼 입장한다.   

   

 천국을 안내하기 위해 베아트리체가 처음 등장할 때 마치 고귀한 왕자와 결혼하는 신부 같다. 하얀 웨딩드레스는 아니지만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흰 베일을 쓰고 수레를 타고 나타난다. 어디서 본 듯한 연출이다. (옛날 영국 찰즈 왕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식이었을까?) 단테에게 있어서는 실제로 마음속 영원한 신부이기 때문에 최고 우아한 모습으로 그려냈을 것이다. 기본 의상은 어려서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주홍빛이고, 아가서에서처럼 기치를 벌인 군대의 엄위한 모습도 있다.


천사들의 손에 의해 위로 날아올랐다가 수레의 안과 밖으로

다시 떨어지는 꽃들의 구름 속에서 하얀 베일에 올리브 가지를 두르고

초록색*** 웃옷아래에 생생한 불꽃색의 옷을 입은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 (연옥 30곡 31-33행)

  

배에서 일하는 부하들을 보고 뱃머리나 고물에 서서

격려하는 제독의 모습으로 전차의 왼편에서 솟아오르는 여인이 보였다. **   (연옥 30곡 59-63행)


 2. ‘단테여하고 이름을 불러준다,  

    

 『신곡』전체에 걸쳐 유일하게 단테의 이름이 나오는 곳이다. 생전에 일방적인 해바라기 처지였던 단테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무척 그리웠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원 없이 '단테'를 부르는 베아트리체의 음성을 듣는다.  

   

“단테여, 베르길리우스가 그대를 떠났다 해도

아직은 울지 말아요. 아직은 울지 말아요.

그대는 또 다른 칼 때문에 울어야 할 테니.”   ** 

(연옥 30곡 55-57행)

  

 3. 이번에도 단테는 부끄러워 베아트리체를 쳐다보지 못한다.     

 

“날 보세요! 나 정말 베아트리체이니!”---

나는 머리를 떨구고 맑은 샘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어린 내 그림자는 부끄러움으로 가득했다. 나는

재빨리 눈을 강가의 풀로 돌렸다.   **

(연옥 30곡 73행/ 76-78행)

 

 첫 대면에서 단테는 고개를 떨구었다. 글의 맥락에서는 그녀의 신비와 권능에 압도되어서지만 왠지 젊은 날 베아트리체 근처에만 가면 얼어붙은 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멀리서는 마음껏 바라보았으면서, 가까이서는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단테의 핑크빛 마음이다.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마치 단편 『소나기』에서 물을 움키던 소년과 흡사하다. 정식으로 마주할 때까지 몇 번의 예비 단계를 거쳐야 했고,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또 기절해 버렸다.

(여기서 기절한 것은 사랑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뉘우침 때문에.)


그녀는 너울을 쓰고 강 건너편에 있었지만

지상에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지상에서 그녀는 최고로 사랑스러웠는데도---

순간

나는 아찔하여 기절하고 말았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그녀만이 안다.  **

(연옥 31곡 82-84행/89-90행)

 4. 나중에는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천사에게 혼이 난다.


 천사들의 요청에 의해 베아트리체가 두 번째 아름다움(입가의 미소)을 보여 준다. 끝없이 살아 있는 빛의 광채라고, 어떤 시인도 눈앞에 비친 그대로 그려 낼 수 없을 거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다가 결국 천사에게 야단맞는다.


십여 년의 갈증을 풀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다른 감각들은 모두 꺼진 듯했다.---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면 안 돼요!” **

(연옥 32곡 1-3행/ 9행)


  짝사랑하는 사람은 순전히 상상 속에서만 사랑하는 대상과 만나 어쩌고 저쩌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상 세계 속에서 스토리 전개는 맘껏 자유이다. 단테는 <연옥>의 마지막 부분에서 베아트리체와 설레는 재회를 하고, <천국>으로 꿈같은 데이트를 이어간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지고(地高)의 선(善)을 찾아가는 여정을 걸으며…. 인생 후반의 오랜 유랑생활 동안 시인은 이 부분을 적으면서 위로와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

*『신곡』단테 알리기에리 장편서사시, 귀스타프 도레 그림,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7

**『신곡』연옥 편 단테 알리기에리,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 여기서의 흰색, 초록, 붉은 의상은 각각 믿음, 소망, 사랑을 암시한다고 한다.『단테 신곡 강의』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2022에서


대문의 그림 사진: BARABÁS Miklós <Arrival of the Daughter-in-Law> 1856 헝가리국립미술관

                        그림에서  신부의 모습을 클로즈업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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