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는 1285년 부유한 명문가 집안의 엠마 도나티와 결혼했다.* 우리나라 이조시대처럼 그 당시 피렌체에서는 혼인이 더 큰 동맹관계를 구축하려는 두 씨족 간의 결합이었다고 한다. A.N. 윌슨의『사랑에 빠진 단테』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단테의 부친이 단테를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구엘프 가문인 도나티 가(家)와 결혼시켜 가문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야심이 있었다는 증거- 열한 살의 단테 알리기에리가 젬마 도나티와 약혼자임을 증명하는 1277년 1월 9일 자 법률 문서- 가 남아있다. **
베아트리체의 아버지 폴코 포르티나리는 피렌체 통령을 몇 차례 지낸 부유한 은행가로 딸을 더 유력한 집안의 시모네 데 바르디와 정혼시켰다. 이들 네 사람 모두 본인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결혼이다. 단테 집안도 명문가였지만 이 가운데서는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인다. 단테와 엠마, 베아트리체가 살았던 집은 탑이 즐비한 산 마르티노 거리에 모여 있었다니, 자라면서 서로를 얼핏 얼핏 보았을 것이다.
출신 가문 이외에는 엠마의 성품이나 부부 관계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베아트리체와 단테의 주변 인물들이 작품에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는 반면 아내나 자식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윌슨의 표현을 빌면 단테가 자신의 생애 전체를 알레고리로 만들었고 자기 삶을 시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꼭 자기 삶의 모든 요소들을 동원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시콜콜 자신의 가정사를 얘기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카치오가『단테의 생애』에서 언급한 내용이 있을 뿐인데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가부장적인 시각이 담겨 있어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바가지도 긁으며 남편의 문학적 환경을 해치는 세속적인 아내로 기술하고 있다.
아내의 변덕으로 이 모든 사색을(시인으로서의)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
굵직한 사실들에 기초해서 세세한 것들은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남편의 마음이 첫사랑에 머물러 있고, 신분이 불안정해지고, 경제가 어려워진 형편에서 네 자녀를(다른 책에서는 다섯 아들과 외동딸) 낳았다. 두 아들을 시인으로 키웠고, 큰아들은 <천국> 편 사라진 부분을 찾는데 기여한다. 단테의 이름이 두란테 (참고 견디는 사람)에서 왔지만, 엠마도 단테 못지않게 인내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다른 곳을 향한 남편의 마음을 그냥 무던히 포용해 주면서…. 체념한 것일 수도 있다. (요즘 같으면 이혼 이야기가 나올만한데.)
어떤 학자들은 엠마를 단테 인문학의 다른 축이 되는 이성의 표지 혹은 철학의 알레고리로 본다. ****(이런 논의는 어려워서 나는 살며시 발뺌을 하고)
우아한 베아트리체의 세계는 나와 거리가 멀지만, 엠마의 속마음은 어림잡아 이해할 수 있겠다. 그 충직함을 생각하면 연민과 함께 마음속에서 어떤 동류의식까지 솟는다.
짝꿍이 첫사랑을 못 잊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 은혼식을 넘어 오랜 세월 한마음으로 해로하고 있다. 하지만 나름 결혼 생활에서 인고의 시간이 있었고, 조금 핀트가 안 맞지만 사랑의 삼각관계를 맛보아서일 것이다. 30년 넘게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전반부는 시아버지도), 험한 시집살이는 없었으나 막내아들의 마음을 내주어야 했다. 흔히들 아들 둘이면 한 명이 딸 노릇을 한다고 한다. 둘째가 스윗하고 싹싹한 그런 아들이었는데, 그 달콤한 꿀은 온통 어머니 차지였다. 워킹맘으로 낮시간 집을 비우는 바람에 아이가 할머니랑 짝짜꿍이 맞아서다.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늘 아리송하고 어느 때는 처참하기까지 했다.
적고 나니 더더욱 엠마와 결혼 생활의 모습이 다른데 왜 이렇게 근거 없는 친밀감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유랑하며 집필하는 동안 묵묵히 주어진 삶을 살아낸 것이,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살았던 우리 세대와 흡사해서일까? 수폿라이트와는 거리가 먼 수더분한 조연에 대한 응원일까? 그동안 단테를 짝사랑 동지로 여기며 글을 많이 지었는데, 알고 보니 진정한 동지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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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발간된 책에서는 뒷부분 연보에 베아트리체 사후 1년 뒤인 1291년이라고 적혀있다.
『새로운 인생』단테 알리기에리, 로세티. 박우수 옮김, 민음사 2005
** A.N. 윌슨『사랑에 빠진 단테』정해영 옮김, 이순
*** 보카치오의『단테의 생애』(The Earliest Lives of Dante, tr. by James Robinson Smith. 박우수 옮김. 민음사)
**** 박상진『단테』2020, 아르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대문의 그림 사진: 장욱진 <닭과 아이> 캔버스에 유화 물감, 1990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