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쓰기의 세계로

아직은 문학소녀

by 램즈이어

오십 대의 가장 극적인 해후를 꼽으라 하면 단연 옛사랑과의 만남이다. 나는 그런 사랑이 있던 것조차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나를 기다렸었나 보다. 사십여 년이 지나서야 알아차린 가슴 설레는 그의 존재. 얼마나 미안하고 얼마나 통탄했던지. 좀 더 빨리, 좀 더 젊었을 때에 이성과 감성이 조금이라도 더 예리했을 적에 만나서 찬란한 마음을 나눴더라면…. 그의 이름 세 글자는 ‘글쓰기’이다.

오십 초반에 예술가에 대한 갈망이 막연하게 피어오르고 곧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건만, 프랑스어 반에서는 어느 날 또렷이 작가가 되고픈 십 대 때의 꿈을 생각해 냈건만 글쓰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막상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은 오십 대 후반 남편이 우울과 공황장애로 아팠을 때다. 힘듦의 한복판에서 좀 빠져나오자 생경했던 그 손님의 얼굴을 글로 그려 두고 싶었다. 이제는 ‘안녕’하면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바람과 함께.

몇 편의 글을 썼을 때 천사 같은 소설가 선배님이 피드백을 해 주셨다. 글이 모이고 에세이로 등단을 하고 수필집 발간에 이르렀다.

한동안 글쓰기는 다시 마주한 달콤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설렘과 행복감이다. 그것도 초등학교 정도의 소녀가 느낄법한 순정으로. 워즈워드가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했을 때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사물의 모습도 그려진다. 연분홍 장미랄지, 친정 엄마의 가장 아름다웠을 때 모습이랄지. 미지의 세계로 마냥 데려다줄 것 같은 종이비행기나 은하철도 기차이기도 하고 문득 그 자체로 신비로운 무엇이다. 한마디로 내게 글쓰기는 아스라이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경이로이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다에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주변의 거센 바람과 파도를 보고 현실 파악을 했을 때.

나도 글쓰기 세상의 핑크빛 구름 위를 한가로이 노닐다가 갑자기 비교감이 찾아온 날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다가.


자객 1: 전하, 저희도 사냅니다.

맥베스: 암, 목록에선 너희도 사나이로 통하지. 사냥개, 회색빛 사냥개, 잡종개, 삽살개, 똥개, 털 개, 물개와 늑대 개를 한꺼번에 개라고 부르듯이. 하지만 감정서엔 빠른 놈, 느린 놈, 똑똑한 놈, 집개와 사냥개가 풍요로운 자연이 각자에게 넣어준 재능 따라 모두가 구별되어 적혀있어. 그래서 그 전체를 싸잡아 써 놓은 명단과는 별도의 호칭을 부여받지. 사나이도 그렇다. 자, 너희가 (문서에서 한자릴 차지하고) 사나이 말단이 아니라면 말을 해 봐, 그럼 내가 너희에게 일거리를 안겨 주고. #

불의한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한 맥베스가 자객에게 또 다른 위험인물을 제거하라고 명을 내리는 장면이다. 떳떳지 못한 용기를 부추기려고 사냥개의 여러 세부 종(種)을 나열하며 너 자신이 사나이 중의 사나이임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사나이도 멍멍이도 아니면서 이 대목에서 멈칫했다. 나는 감정서의 어디에 속하는 강아지인가? 즉 작가라는 정체성이 떠오르면서, 나라면 이 패밀리 안에서 어떤 종(種)으로 분류될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견공(犬公)은 개(犬) 감정서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뛰어난 후각과 주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거면 충분해하는 것 같다. 똥개든 사냥개든 다른 개와 비교하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을 제패한 듯 컹컹 짖는다. 작가로서도 이렇게 초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쓰기 초기에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픽션은 낯설고 소설 쓰기 수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영부영 여러 해가 흐르고, 자신이 매진할 장르조차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몇 가지 마음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언젠가 명작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최근 이윤주 작가의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를 읽었다. 기자 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쓰고 싶은, 아니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했다는 그의 마음이 와닿았다. 예술로서의 문학을 갈망하는 것.

압도당해도 괜찮고, 현실을 비틀거나 때론 무시해도 되며, 은유와 상징이 팩트를 넘어서는 글로 나는 돌아가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문학이었다.*

부동의 일위를 차지하는 롤 모델도 있다. 프라하의 투잡러 프란츠 카프카. 기존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이 겪는 내적 불편함을 썼던 소설 내용도 좋지만 그의 생활 패턴을 더 사랑한다. 산재보험공사 직원으로 기존의 업을 유지하면서 퇴근 후 ‘쓰는 사람’으로 살았던 일상을 본받고 싶다. ##

마음으로는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현재로선 자원이 빈약한 것도 깨달았다. 독서와 직접경험을 쌓기 위해 약 10년쯤의 기한을 잡았다.

어느 글벗님 글에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초대 소장 플렉스너의 교육 철학을 읽었다. 인간의 창의성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나온다는.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호기심 기반의 탐구에서 나왔다. 연구자는 쓸모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그 쓸모를 모르는 채로 탐구에 몰입해야 한다.” **


과학 분야 이야기지만 문학에서는 더더욱 적용될 것이다. 나도 잠시 쓸모없는 글쓰기를 할 요량이다. 당분간은 뒹굴뒹굴 글쓰기로 놀고, 나 자신이 재미나는 글만 실컷 써보며.

하지만 금세 '창의성도 매일의 성실한 일과에서 피어나는 거야’라고 속삭이는 내면의 범생 목소리가 들린다. 일단 세월이 허투루 가지 않도록 날마다 쓰는 습관을 길러 보자 하는데 쉽지 않다.

어제는 아파서 못 썼고, 오늘은 누가 찾아와서 못 쓰고…. 카프카도 일기에서 ‘규칙적으로 꼭 쓰기’를 스스로에게 거듭 다짐했다니 적잖이 위로가 된다. 나이를 의식하여 종종 조급한 마음이 들 때면 70대에 그림을 시작한 모지스 할머니의 목소리를 기억하려 한다.


“좋아하는 일을 천천히 하세요. 때로 삶이 재촉하더라도 서두르지 마세요.” ***

---

* 이윤주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위즈덤하우스 2021년

** 애브러햄 플렉스너의 1937년 발표 에세이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

*** 애나 메리 모지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류승경 편역, 수오서재 2017년

(미국의 국민화가 애나 메리 모지스는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80세에 개인전을 열고 100세에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전집 5 비극 II 맥베스』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14년

## 김남금 『출근하기 싫은 날엔 카프카를 읽는다』 앤의 서재 2024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