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감각을 지닌
오십 대가 지나고서야 읽은 실라 드 리즈 박사의 책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여성들은 갱년기에 거미의 감각이 깨어난다고 한다.
저는 10대 사춘기 소녀들에게 이 거미의 감각이 유달리 강하게 나타나다가 호르몬이 변화하면서 묻히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훗날 갱년기에 이르러 두 번째 호르몬 변화를 통해 안개가 걷히면 흔히들 말하는 제3의 눈이 열리고 사물의 본모습을 보는 눈이 뜨입니다. ‘세 번째 눈’이 달린 것처럼 직관적 감각이 종종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375p) *
거미의 감각이라. 그러고 보니 풍성히 거미줄을 쳐놓고 구석에서 잠자코 망을 보는 모습이 어딘가 중년 여성을 닮은 면이 있다. 거미의 감각기관에 대해 알아보았다.
# 진동감각과 청각: 거미 다리의 '균열형 슬릿 기관(lyriform slit organ)'은 마치 현악기의 현처럼 생긴 미세한 틈으로, 주변의 아주 작은 진동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 깡충거미는 소리도 듣는다.
# 촉각과 화학 감각
거미의 다리에는 수많은 감각모가 있어서 직접 만져보고 먹잇감의 종류를 파악하거나, 짝짓기 할 때 배우자를 식별한다. 냄새나 맛도 느낄 수 있다.
# 전기장 감각: 정전기적으로 공기 분자와 상호작용하는 거미줄을 만들어 바람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한다. 이른바 '풍승(風昇) (balooning)'이다.
가히 감각의 여왕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느끼고 파악하는 능력이 과연 내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면 -주로 중년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몹시 닮아 있다.
아가서 크리스티도 자서전에서 친정어머니의 놀라운 촉을 이야기 한 대목이 있다. 군 복무하던 몬티 오빠가 경제적 문제로 시달리면서도 부모님께는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마 찌푸린 모습을 척 보고는 어머니가 던진 한마디.
“아니, 몬티, 너 고리대금업자한테 갔던 거니? 아니면 할아버지의 유산에 손을 댄 거니? 그러면 못써. 그러지 말고 아버지랑 의논을 하렴.” (29p) **
루이즈 부르주아의 커다란 조형 작품 <마망 Maman>도 이런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이 프랑스 예술가도 어머니 하면 커다란 거미가 떠올랐나 보다. 청동과 스테인리스 스틸과 대리석으로 빚어진 대형 거미의 몸체를 처음 보았을 때 생소한 전율을 느꼈다.
땅을 딛고 있는 여덟 개의 길쭉한 다리는 위험한 것들을 물리치는 파워를, 가슴 한가운데 품고 있는 오동통한 알집은 한없는 모성을 보여준다. 든든함과 뭔지 모를 친근함으로 다가오며.
여성의 몸속에 있는 테스토스테론의 성격이 드러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이 호르몬의 역할은 에너지, 탄탄한 몸, 결단력, 추진력 그리고 성욕인데, 갱년기 전까지는 여성호르몬에 밀려 그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그러니 영화 <스파이더 맨> 은 <스파이더 우먼>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거미줄을 이용해 공중 곡예를 하고, 벽을 타며, 쉴 새 없이 고층 빌딩 숲을 활강하다가 위기에 빠진 연약한 이를 결단코 구하고야 마는 히어로. 그가 마스크를 벗었을 때 평범한 이웃 사진기자 파커 볼스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 집 갱년기 엄마(maman)였다면?
실제로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스파이더 우먼이 있다. 나바호 인디언들에게 담요 짜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거미 여인이다. 땅속 깊은 곳 신성한 거미줄 집에 살고 있는 ‘나쉬제이이 아스자(Na'ashjé'íí Asdzáá)’, 그는 나바호족 신화 속의 쌍둥이 전사를 도와주던 지혜로운 정령으로 창조와 예술의 여신이다. ***
여성은 갱년기에 이런 존재와 일맥상통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오십 대 초반에는 늑대족에 가깝게 후반에는 슬기로움과 힘을 갖춘 거미족의 모습으로. 완경의 몸에 생기는 이런 변화는 인생 1막의 출산의 비밀만큼이나 오묘하고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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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라 드 리즈 지음, 문항심 옮김 『불 위의 여자』 은행나무, 2021년
**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 김시현 옮김, 황금가지 2014
*** 『거미박사 김주필의 거미 이야기』 김주필 지음, 2006, 도서출판 쿠키
## 대문의 사진: 루이즈 부르주아의 <마망 Maman> 호암 미술관의 호암 호수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