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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Apr 29. 2024

잃어버린 시야

녹내장을 얻다

 3년 전 왼쪽 시야의 사분의 일이 없어졌음을 확인했다. 다시 회복될 기미는 없다고 한다. 친정어머니가 계셨더라면 너 눈이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냐고 혼을 내셨을 것이다. 10년 정도 정밀 안과 검사를 받지 않았으니 야단맞아도 쌌다.

 40세에 라식 수술을 한 후에 각막 건조증이 생겨서 한동안 안과에 다녔으나 50대에는 정기 검진에서 간단한 체크만을 해왔다. 일찍 돋보기를 쓰게 되자, 약한 근시의 남편이 안경 없이 신문을 척척 읽는 것이 부러웠지만 눈 건강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오십 후반이 되어 먼 거리 시력이 떨어지고 침침함을 느꼈는데 라식 효과가 약해져서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주변 친구들이 많이들 백내장이나 황반변성이 왔다고 해서 그제 서야 정밀 체크를 받으러 갔다.

 “이마를 꽉 대시고, 가만히 정면을 보세요.”

 안과 장비에 턱을 괴면 갑자기 깜깜한 우주공간이 펼쳐진다. 낯선 은하계에서부터 쉭 스치는 UFO까지 넋을 잃고 바라보노라면 한가할 때가 아니라는 듯 차가운 명령이 떨어진다.

“이제 옆방에서 시야 검사하십니다.”

 이번엔 어둑어둑한 방인데 기계에 얼굴을 고정하니 새로운 밤하늘이다.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이름 모를 별들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어스름 속에 갑자기 수상한 별똥별이 나타난다. 어느 방향에서 어떤 밝기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다. 한 놈도 놓치지 않고 보자마자 클릭 클릭하며 보고 해야 한다. 한참의 결전이 끝나니 잘했다는 격려 음성과 함께 최종 상황실에 보내진다. 엄격해 보이는 보스 앞 컴퓨터 화면에는 내가 치러냈던 여러 우주 전쟁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는 한 화면 앞에서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듯 표정을 찌푸린다. 그런데 그것은 무척 아름다운 영상이다. 언젠가 개기 월식 때 보았던 창백한 황색의 보름달! 그 달을 중심으로  수려한 나뭇가지 같은 실개울이 뻗쳐있고.   

 “시신경 유두가 손상되었는데…. 그간 안과 체크 안 받으셨어요?”

 신비한 영상을 음미할 때가 아니라 질책을 달게 받아야 하는 순간이었나 보다. 이어서 보여주는 시야 전쟁 성적표에는 좌측 안쪽 아래 사분의 일의 영토가 먹어 치운 사과 1/4 쪽처럼 사라져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주변부 시야부터 큰 원을 그리며 점점 잃는다고 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안쪽이어서 오른쪽 눈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눈치를 못 챈 것이다. 바깥쪽이었다면 운전할 때 옆 차를 못 봐 사고를 낼 수도 있었다. 설상가상 앞으로 도움이 되어야 할 오른 눈은 백내장과 황반변성이 시작되고 있다니! 정상 안압 녹내장이지만 안압을 떨어트리는 것 외에 뾰족한 치료는 없고 잃은 시야는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

 괴로운 소식의 첫 번째 반응은 인정하지 않음(denial)이라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부정(denial)의 감정이 일었다.

“고혈압, 당뇨도 없고 가족력도 없는데 웬 녹내장이요?”

“옛날 분들은 녹내장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갔을 수 있죠.”

“독서가 영향을 미쳤나요?”

“독서랑은 큰 상관없어요.”

 책은 읽어도 되는 것에 그나마 안도하며 진료실 밖을 나오니 낯선 대기실 풍경에 또 한 번 놀란다. 5년이나 10년 후로 휙 시간 이동을 한 듯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희끗희끗한 노령이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현실파악을 해본다.

 ‘이렇게 나이 든 그룹의 질병을 앓고 있구나! 하긴 나도 이렇게 나이 들었는데 젊다는 환상을 갖고 있는지 몰라’

 남편에겐 지레 선수를 쳤다. 중요한 운동은 안 하고 책만 들여다본다고 늘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 본 거랑은 상관없대.”

 그러나 내 마음 은밀한 곳에서는 밤새 눈을 혹사시키며 글 쓴 것이 원인일 거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생애 첫 수필집을 낸 대가인 것 같은 느낌이…. 컴퓨터와 핸드폰에 장시간 노출됨이 시신경을 힘들게 해서 손상시킨다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眼科醫는 내 경우 아주 오래전부터 복합적인 이유로 시신경 손상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글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을 엄두가 안 나고, 새해 결심으로 시작한 고전 읽기 등도 흐지부지 되었다.

 인터넷 검색에서 다양한 녹내장 환자의 시야 손상을 보았다. 양쪽에 검은색 커튼이 쳐진 것처럼 시야가 없어진 케이스에 가슴 철렁한 후로는 내 눈이 빠르게 나빠져서 시력을 거의 잃는 악몽을 꾸었다.

 귀가 좀 어두운 남편과는 나중에 서로 상대방의 눈과 귀가 되어 주기로 했다. 타플로탄이라는 안약을 열심히 넣고 혹시 시야가 좋아졌나 싶어 실로암으로 가는 나의 모습에 (다니는 안과 병원의 상호가 실로암이다.) 진흙 반죽을 눈에 붙이고 연못으로 가는 신약성서의 소경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알레르기 계절인 4월이 되니 눈이 더욱 엉망진창이 되었다. 녹내장 안약은 흰자위를 충혈시키는데, 알러지성 결막염이 추가되니 눈이 따끔거리고 빨개지는 것이 배가 된 것이다. 직장에서 아침에 나를 마주하는 고객들이 내 벌건 토끼눈을 보고 어떤 억측을 할 수도 있겠지 싶다. 밤새 술을 마셨나? 간밤에 부부싸움을 했나?

 이른 봄 내내 울적한 시간을 보낸 후 5월 어느 날이었다.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의 연녹색 숲이 유난히 선명하고 풍성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지금 여기서 이렇게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는 데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걱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총 천연색으로 잘 보일 때 자주 초록 나무를 보고 한껏 파란 하늘을 보리라.’ 잃어버린 시야는 미련 없이 포기하고 선생님 말씀처럼 더 나빠지지 않게 노력하기로 했다.

 하지만 글쓰기로 자아실현을 하고 싶었던 인생 2막에 빨강불이 켜지기는 한 거다. 좋은 글의 밑천인 독서량이 한심하리만큼 부족해서 이제부터라도 채워가려는 참이었는데…. 

 이런저런 궁리를 해본다. 오디오 북 듣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자. 대하소설이나 긴 글은 피하고 다독보다는 정독으로 가야 할 것이다. 묵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오히려 창의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긴 글쓰기가 겁나면 시를 지으면 되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눈 핑계 대지 말고, 작가의 길은 조금씩 천천히 자고 자신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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