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콩돌이 아빠의 첫 학교에 들어가 교실과 의자를 둘러보았습니다. 넉넉하고 발이 닿을 듯 말듯했던 책상과 의자는 이제 한참 허리를 숙여야 표면의 흠을 살필 수 있을 만큼 낮아졌고, 하교 후 동네 친구들과 야구공을 던져 맞추던 학교 담벼락 옆 커다란 느티나무는 이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해 보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은 그들 나름의 변형이 생겼고, 보는 제 입장도 서서히 바뀌며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제가 우리 아들만 한 꼬마였을 때는 구타와 체벌이 빈번했었지요. 당시에는 때리는 어른들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는 추측으로 일방적으로 아이의 잘못을 뉘우치게끔 했습니다. 세월이 어느덧 30년 가까이 지나고 동네의 모습도,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도 많은 차이가 생겨나는 것을 봅니다. 300 원하던 컵떡볶이가 홀연히 사라졌듯이 어울려 지내던 이웃들은 떠나고 서로 부딪히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 조심하는 익명의 사람들만 남은 것 같습니다. 더불어 홍수처럼 넘쳐나는 육아 관련 서적과 '자존감 높이는 훈육 노하우'를 섭렵하다 보면 '이렇게 조심만 하다 보면 무엇을 하고 할 수 있는 말은 있나'라는 의문이 듭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저로써도 들을 때마다 난처했던 저 질문은 마음이 말랑말랑한 아이가 안정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조언을 듣고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리스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선천적인 반골기질은 아이가 어느 정도의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될 무렵부터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한술 더 떠 온갖 것의 선호도를 경쟁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제1라운드는 '아빠 대 엄마'
아빠 품을 쫓으며 잠을 청하던 아기 콩돌이는 이제 감정기복이 있는 장난꾸러기 아빠보다는 무던한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그림을 그릴 때에는 아빠의 손을 많이 타는 시기였기에 일말의 주저 없이 저를 선택해 주었습니다.
제2라운드는 '감자칩 대 요구르트'
콩돌이가 단음절 언어 -'물', '밥'과 같은- 를 말하면서 표현이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할아버지댁을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온 밤 열 시 무렵 "감자!"를 외치며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귀신같이 냉장고 안에 있는 감자를 기억하는지 신기해하며 부랴부랴 감자를 증기에 찌기 시작했습니다. 대성통곡을 하는 아이에게 감자가 익을만한 10분의 기다림은 한 시간같이 느껴졌고, 결국 증기가 바로 닿는 감자의 아랫부분을 잘라내어 아들에게 건넸습니다. 찐 감자 조각을 본 아이는 더 목청을 놓아 울기 시작했고, 저는 감자가 아닌 감자칩을 원했다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요구르트의 반전 승이었습니다.
제3라운드는 '외할머니 대 친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콩돌이의 좋은 친구입니다. 엄마 몰래 맛있는 사탕도 처음 먹여주시고 어부바로 찾아간 편의점에서 맛이 궁금했던 라면도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같이 먹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친할아버지는 짓궂은 장난에 당황하여 뒷걸음질치는 손자에게 변신로봇을 척척 안겨주십니다. 하지만 질문과 함께 외할머니의 승.
제4라운드는 '빠방 대 돈가스'
아직도 콩돌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물건은 자동차류입니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미니어처 자동차, 리모컨으로 조종할 수 있는 스포츠카, 외삼촌이 사준 탑승 운전차, 자동차에서 온갖 형태로 모습을 바꾸는 변신자동차, 그리고 거리를 활보하는 구급차, 소방차, 굴착기 등. 아무리 바삭하고 육즙이 입을 채우는 돈가스도 자동차가 얻고 있는 신임을 넘볼 수 없습니다.
제5라운드는 4강 '아빠 대 요구르트'
내심 콩돌이 아빠는 최종우승까지 압도적인 연승행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물고물 새부리 같은 입을 움직이며 선택한 것은 요구르트이고, 아빠는 흔쾌히 승부에 승복합니다.
제6라운드는 또 하나의 4강 '외할머니 대 빠방'
외할머니의 아늑함보다는 손끝에 닿는 빠방의 미끈하고 단단한 느낌이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위 그림이 그려지던 시기보다 1년이 훌쩍 흐른 지금은 세상 모든 응석을 다 받아주시는 할머니의 마음을 챙기려 외할머니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으나 당사자의 대답은 늘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최종 결승 7라운드는 '요구르트 대 빠방'
콩돌이에게 인터뷰를 이어가며 선호의 폭을 좁혀가던 콩돌이 아빠는 기대하지 않았던 요구르트의 선전에 이변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귀추를 주목합니다. 우리 콩돌이는 토너먼트에 섭외되지 못할 뻔했던 요구르트를 1등의 자리에 앉혀줍니다. 하심의 마음으로 묵묵히 아들의 목을 축여주고 달콤한 위안을 주던 요구르트는 아빠, 엄마, 장난감, 그리고 입안을 휘감은 돈가스의 풍미와 감자칩의 바삭함을 뒤로하고 결승선을 통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