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로션 좀 발라

<아들이 아빠가 되는 드로잉> 시리즈

by 콩돌이 아빠
<로션 좀 발라 01> 15 x 23 cm, 종이에 펜과 수채 2022
<로션 좀 발라 02> 15 x 23 cm, 종이에 연필 2022

무언가 절실할 때, 꿈에 나타납니다. 개인전이 수개월내로 다가오고 대형 메인 작업에 시행착오가 반복되자 전시에 관련한 여러 상황들이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긴급히 만드는 상황으로, 때로는 성황리에, 어느 밤은 악몽처럼 전시장에 한가운데 제가 놓여있었습니다. 정신적인 압박과 약간의 설렘으로 매일 시간이 있는 만큼 지하 창고에서 작업들과 씨름을 벌였습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하루, 저는 새벽부터 작업실에서 실을 엮다가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시간은 훌쩍 저녁이 되었고, 그날은 제가 하원 후에 할머니와 함께 있는 콩돌이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언뜻 확인한 탁상시계는 벌써 7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저는 아쉬움과 불안을 정리하면서 작업실을 나섰습니다.


당시에 하던 작업은 몸이 고된 공정이 많았습니다. 3m가 넘는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가 거미줄처럼 가는 실들을 묶어주고, 수직 방향으로 내려오는 나일론 줄에 물감을 바르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덕분에 옷은 항상 남루하고 물감과 먼지 범벅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몰래 나서는 집에서는 콩돌이가 깨지 않도록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할 때가 많아서, 저녁 무렵에는 땀과 체취로 옷에서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지요.


작업실을 나서 부랴부랴 엄마댁에 도착했고, 늘 그렇듯 비밀번호를 눌러 집으로 들어가 아들을 찾았습니다. 콩돌이는 남루한 모습의 아빠를 반겼고 곧 즐겁게 보던 만화에 다시 눈을 돌리고 할머니가 떠주는 미역국을 받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제발 얼굴에 뭐 좀 발라. 얼굴이 이게 뭐야, 무슨 팔십 노인처럼 주름이... 얼굴 푸석한 것 좀 봐. 로션 좀 발라 좀. 너무 건조하잖아 얼굴이, 피부가. 네 아빠는 만날 뭘 발라서 피부가 너보다 더 좋아. 로션 좀 발라, 로션 좀."


"로션 없어. 괜찮아, 안 발라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네 얼굴 좀 봐. 너무 푸석푸석하잖아. 씻고 나서 그거 바르는 게 뭐가 어렵다고. 얼굴에 뭐 좀 발라."


"아빠, 미니 트꽁대 볼래."


"미니 특공대?"


"응-. 민이 트꽁대."


"콩돌아, 미역국 한 숟가락 더 먹어. 콩돌아, 아빠 얼굴에 로션 좀 바르라고 해."


"아빠, 노뎐 발라아!"


"아빠 로션 바른 거야."


"바르기는 뭘 발라!"


"압빠! 노뎐 발라아!"


"알았어, 로션 바를게."


"진짜 좀 발라. 진짜 얼굴이 이게 뭐야. 진짜 속상해... 어이구 금이야 옥이야 키워놨더니 이게 뭐야... 진짜 속상해..."


"아빠! 노뎐 발라아!"


"..."


엄마는 어린 제게 권투선수 장정구 파마머리를 해주었고, 예쁜 멜빵바지에 나비넥타이를 매어 입혔습니다. 꽃을 좋아하던 그녀는 어려서 우리 가족이 살던 13평 작은 아파트 베란다에 화분을 여러 개 돌보았고, 종종 손으로 꽃받침 한 저와 함께 사진에 담곤 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수십 년 흘러 엄마가 그리 곱게 키우던 막내아들이 빛이 들지 않는 지하실에서 실, 물감, 먼지로 범벅이 되어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남루한 옷에 거친 피부로 집에 오는 것이 마음에 아팠나 봅니다.

keyword
이전 08화콩돌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