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능력. 즉 오늘날의 과학으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텔레파시, 투시력, 예지력, 염력 따위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틀어 말한다.
출처: Daum 한국어 사전
"떤쨍님, 약만 쥬데여, 약만. 주사 말고 약만 쥬데여."
"허허, 그런 말도 할 줄 아니?"
집에서는 떼를 쓰며 최소한의 표현으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던 콩돌이는 마치 접신을 한 듯 정확한 문장을 적확한 상황에서 빠른 속도로 내뱉었습니다. 그만큼 한두 번 피부를 찔러들어오는 주삿바늘에 대한 불쾌한 기억이 뇌리에 남았나 봅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자신조차 깨닫지 못했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은 그만큼 긴박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1년에 한 번 겪을까 하던 감기는 콩돌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자 네댓 번은 기본으로 앓고 지나갑니다. 끊이지 않는 기침, 새벽을 하얗게 지새우며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며 맞서는 열감기, 훔쳐내고 풀어도 수도처럼 흐르는 콧물. "잘 가, 다시는 만나지 말자."라고 손을 흔들며 쫓아내는 감기는 홀대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를 찾아옵니다.
어린이집에서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감기는 엄마와 아빠를 타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로 흘러갑니다. 두통과 기침으로 앓아누운 할머니를 찾은 사촌누나도 금세 감기를 받아가고 큰엄마, 그리고 큰아빠도 콜록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어디에선가 시작한 감기는 가족 전체를 훑으며 지나가고 콩돌이네부터 시작해서 큰아빠네까지 갔다가 사그라들면 다시 큰아빠네서 시작해서 콩돌이네까지 의좋은 형제가 쌀가마니 나누듯이 주고받기를 계속합니다.
아이가 아프면 집안일은 갑절로 늘어납니다. 등원이 어려울 만큼 콩돌이의 상태가 안 좋으면 집안에 머무르며 병식을 지어 먹이고 놀아주고 같이 병원에 들르고 밤에는 잠이 잘 오지 않는다는 투정을 받아내면 진이 빠지고 돌보는 사람도 감기가 옮아 초저녁부터 눈꺼풀이 감겨옵니다. 집안은 장난감과 온갖 포장지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힘듭니다. 아이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활력을 줄 뿐만 아니라 그 곁을 지키는 사람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여유를 돌려주기에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들을 통과하며 언뜻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엄마 세대, 그리고 그보다 약간 더 연배가 있으신 40-50년대생 여성분들은 많은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서 학교를 가지 않고 집안 일과 밭일을 돕고, 출가외인이 되어 남편과 시부모를 모시며 자신을 지워나갑니다. 말하고픈 의견도 잊고 그저 듣고 행동하고 집안이 멀끔할 수 있게 분주히 뒷바라지를 해나갑니다. 아이들을 돌보고, '집에서 애 보는 게 뭐가 힘드냐'는 괄시를 묵묵히 삼켜내면서 엄마가 됩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갈 무렵이면 시댁 또는 친정에 병치레를 하시는 어른들을 돌보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들이 늘어갑니다. 그리고 당신이 할머니가 되면 다시 반복되는 육아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잠이들고 갓난쟁이를 데리고 찾아올 자식을 맞이하기 위해 새벽녘에 무거운 몸을 일으킵니다.
이따금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요즘 부모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포대기로 조그만 아이의 엉덩이와 등을 감아 어부바를 하고 하염없이 직장으로 떠난 자식들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을 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격투기와 축구로 몸을 단련시킨 저도 아이를 안고 서있는 것이 군생활의 완전군장 행군만큼 피로한데, 저 자그마한 체구에 근육 없이 동글동글한 체형을 가진 할머니들은 무슨 힘으로 아이를 업고 손에 붙잡고 병원으로 태권도장으로 종종걸음 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레짐작컨데 그것은 어렵게 취직한 자녀들이 본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자신의 노년마처 포기하는 엄마-할머니의 초능력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