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옛 사진에는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포마드로 한껏 머리카락을 넘긴 콩돌이 아빠가 배시시 웃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짝 자라 올라온 손주들의 손톱을 못 견뎌하며 바짝 깎아내는 할머니는 30여 년 전에도 어린 아들의 외모를 멀끔하게 꾸미고 그 모습에 흡족해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외식을 하던 고깃집에서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말쑥하게 생긴 아저씨가 식사를 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저렇게 멋져지겠지?'라는 생각이 불현듯이 스쳐 지나가던 연기 자욱한 돼지갈빗집의 정황이 이따금 떠오르는 것은 제가 당시의 그 아저씨 정도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 왜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가면서부터 만나는 사람들과 느닷없이 마주하게 되는 생활들이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기에 시시각각 최선을 다하고, 회피하고, 그리고 하루를 마감하다 보면 조금은 엉뚱한 곳에 서 있는 저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20대 후반부터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낙심하고 때로는 좋은 전시에 참여해서 가슴이 벅찰 때도 있었습니다. 보시는 분들은 제작 공정과 시간에 대해 의문이 드시겠지만 만드는 사람은 (최소한 저는) 있는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시간, 재료, 비용, 그리고 도움받을 수 있는 연락 닿는 사람들까지. 특히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나이가 들 수록 엄청난 의지를 요구합니다.
9 to 5
반복되는 매일을 짊어지고 버텨내는 직장인들의 보편적인 근무시간입니다. 철부지 같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던 때에는 '나는 내 길을 가겠어!'라는 포부로 대부분의 사람이 뛰어드는 사회생활에서 눈길을 돌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무겁게 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그렇게 존경스럽고 대단해 보이는 것은 아니꼽고 하기 싫은 일을 견뎌내며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갖춰 입은 옷, 뛰어서 몸을 쑤셔 넣는 지하철, 퇴근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어떻게든 짜증을 털어내기 위해 마시는 술. 아마도 제가 어려서 본 고깃집의 그 훤칠한 아저씨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멋진 그림, 황홀한 입체물을 만드려고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다 보니 남들이 다 하는 직장생활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틈틈이 중고등학생을 가르치고 (그마저도 얼마 안 되어서 전시 일정으로 그만두기 일쑤였고) 소포 포장, 증명사진 촬영, 그리고 게임회사 광고제작 등 이런저런 일을 물감 묻은 작업 복이나 집에서 편한 옷을 입고 할 때가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지낼 때 좋았던 것은 외모에 시간을 들이는 것이 멋쩍던 제게 아무도 서로에게 신경 쓰지 않고 누구에게도 함부로 눈길을 줄 수 없는 사회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렇게 30대의 대부분을 정신없이 헤쳐 나온 뒤 한국에 돌아왔지요.
"압빠, 왜 그런 옷 입었어?"
"으응, 저어기 커다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
"압빠, 그 옷 이상해."
"이상해?"
"응, 빨리 내복 입어."
코로나가 막바지로 흘러가던 무렵, 고모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은 저는 부랴부랴 양복을 찾았고, 7년 전 결혼 무렵에 맞추었던 그나마 어두운 색의 정장을 꺼내보았습니다. '결혼하면 체중이 화악 늘 거야~'라며 너털웃음을 짓던 아저씨들의 말에 형식적인 대답을 하며 무시하던 속내를 가졌던 때가 후회스럽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겨드랑이에 살이 통통히 올랐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을 정도로 몸은 불어있었고, 정장 바지는 터질 듯이 조여왔습니다. 간신히 정장에 셔츠를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이리저리 눌러보다가 포기하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콩돌이는 항상 목이 잔뜩 늘어난 반팔티셔츠에 할머니가 가져다준 냉장고 바지만 입던 아빠가 위아래로 어두컴컴한 옷에 끼어있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어색했나 봅니다. 자신도 늘 내복차림에 아빠도 편한 옷으로 바닥을 뒹굴며 놀았으니 빨리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내심 아들의 칭찬을 기대하던 저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모셔진 고모부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이래저래 시커먼 옷으로 갖춰 입은 사람들을 만나 인사드리고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매사에 미신으로 점철된 어머니로부터 듣고 본 것들은 은근히 제 생활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등에 새벽녘 소금을 뿌리던 소리와 그 소금을 으적으적 밟으며 들어오던 아버지의 구둣발자국은 이제 제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집 밖 가로수 밑에서 한참을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아마도 콩돌이를 재우고 혹시 울릴지 모르는 전화벨을 무음으로 바꾼 뒤 아이와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30여분을 전화기를 붙잡고 씩씩거리던 저는 결국 체념하고 편의점에 들어가 가장 작은 꽃소금 한 봉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가능한 어깨 뒤로 넘겨 스스로에게 소금을 세 번 뿌렸습니다. 보도블록에 흩어진 소금은 아이들이 먹다가 흘린 별사탕처럼 여기저기 떨어졌고, 저는 그들을 으적으적 밟고 집으로 들어간 뒤 문을 빼꼼히 열어 콩돌이와 콩돌이 엄마가 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성질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저는 세상모르고 꿈속을 헤매는 두 사람을 본 뒤 조용히 정장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꽉 끼어진 허벅지와 엉덩이를 빼내며 '정말 독하게 살을 빼고 말리라'는 다짐을 합니다.
다시금 흐느적거리는 내복차림으로 돌아온 저는 고양이처럼 숨소리마저 죽이며 이불을 들추고 몸을 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