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동질감이나 일체감을 주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우리 엄마 세대와 할머니 세대에서 포대기가 하던 역할을 넘겨받은 아기띠는 여러모로 편리했습니다. 등에 업고 청소를 할 수도 있었고, 가슴에 안고 아이와 같은 방향을 보며 외출을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가슴에 붙이고 두 손을 자유롭게 쓰는 것도 참 획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몇 개의 전시가 연기되거나 없어진 후 정말 오래간 커오던 동네로 돌아왔습니다. 또래 친구들이 사회의 주역이 되어가고 책임이 많은 자리로 이동을 하는 소식을 들으면 나 혼자만 종이로 만든 돛단배가 정처 없이 물결을 따라 떠다니는 것처럼 고독하고 두려웠지요. 다시 돌아온 고향, 사라진 정체성과 일, 그리고 부족한 수면과 함께 전쟁처럼 치러나가는 육아를 겪어가며 어두컴컴한 베란다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슴에는 아이를 붙이고 쉬운 말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에게 건넸습니다.
점점 까맣게 깊어가는 밤거리에 별빛 같은 조명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사람들도 손에 무언가를 들고 집으로 향합니다. 까치집을 한 머리에 매일 입는 편한 옷에 익숙해진 저는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던 몇 번의 화려한 미술관의 조명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언가 바삐 만들고 싶었고, 가득 찬 일정에 시달려보고 싶었지만 모든 것이 잠잠히 사라지고 아이를 등으로 가슴으로 업고 품으면서 집을 정리하고 산책을 다녔습니다. '그림이 그리고 싶다'는 의욕은 성냥불처럼 일어났다가 수분 수초 내에 다시 사그라들고 아이와 함께 스르르 잠들곤 했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만큼이나 고전적인 질문은 '00은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고 느낍니다. 클리셰나 신파가 살아남는 이유는 봐도 봐도 그 정황이 궁금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아이가 몇 개나 되는 직업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내심 저는 콩돌이가 과학자가 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을 때만 보여주던 동영상들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고, 콩돌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악당들을 쫓는 경찰관이 가장 멋져 보였나 봅니다. 공원에서 만나는 경찰관 아저씨에게도 아빠와 함께 경례를 해보고, 도로를 질주하는 순찰차를 보면 누구보다 빠르게 긴급상황임을 알아채니까요.
저는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흐릿할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진로가 불분명했습니다. 어쩌면 '막연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고, 그저 보다 나은 환경으로 갈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해 주는 기관으로 계속 이동해 온 것 같습니다. 대입을 준비할 무렵, 입시를 안일하게 준비했다는 경각심을 느낌과 동시에 '그림을 그리면 보다 좋은 학교로 진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입시미술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하루빨리 지옥 같은 수능과 4시간마다 완성시켜야 하는 그림들에서 벗어나 푸른 잔디밭에 이성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웃고 지낼 수 있는 대학에서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고 대학교 문턱을 밟던 때가 기억에서 많이 흐릿해져만 갑니다. 어느덧 저는 힘이 빠진 운명론자가 되었고, '이러려고 그랬나 보다'라는 말로 상황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저는 멋진 미술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노력하고 애를 쓸수록 제 재능과 환경의 한계를 맛보아갑니다. 겸손은 미덕이 아니고 생존에 필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상은 넓고 위대한 작가들은 하늘의 별처럼 촘촘하고 층층이 쌓여가고 있으니까요.
콩돌이에게 저는 '미술가' 아빠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매일 집에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는 정체불명의 유학파 주부가 아니라 정제된 공간에서 품위를 갖춘 그림들을 소개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습니다. 눈물깨나 쏟은 후에 기적처럼 얻게 된 개인전에서 아들은 아빠에게 "It's amazing!"이라는 탄성을 힘껏 치켜든 조그만 엄지손가락과 함께 연발했고, 저는 콩돌이가 가르치지도 않은 영어를 어디서 배워왔는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