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수 시리즈: 부풀림 02> 20 x 30.5cm, 종이에 과슈를 이용한 펜드로잉 2022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옷'
유년기 사리분별이 안될 때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콩돌이 아빠가 어렸을 무렵, 90년대 초중반에는 더욱 그랬지요. 한결같이 빽빽한 파마머리에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은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거리의 꽃이나 가로수와 같은 풍경처럼 느껴졌습니다. '유행'이라는 한마디 말로 일축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느낌은 오랜 시간 동안 어린아이의 눈에 맺혀 있었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아이는 아빠가 되고 자신이 어려서 보던 풍경을 아들과 함께 바라봅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감히 시작을 알 수 없는 문양은 고대문명과 인도를 거쳐 스코틀랜드에 이릅니다. '페이즐리'는 눈물, 물방울, 씨앗, 과일의 단면 등의 여러 디자인적인 단초를 품에 안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비단 우리나라의 연배가 있는 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곳에서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사랑받는 친근한 양식으로 스며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철부지 막내아들이던 제 눈에 비친 그 모습이 훌쩍 수십 년이 흘러 다시 펼쳐졌습니다.
콩돌이와 함께 찾은 놀이터에는 그날따라 각양각색의 페이즐리 패턴 옷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는 파마머리를 하고 아이들 곁에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출처에 큰 의의를 두지 않고 수채화처럼 번져나간 그들의 멋이 한참 동안 생각나곤 했습니다. 다시는 유약하게 흘러내리지 않겠다는 듯이 꽈악 말려들어간 파마머리는 6-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아프로펌'을 상기시켰고, 그 뒷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해 빼꼼 당사자의 얼굴을 살피면 지미 핸드릭스가 있어도 놀랄 일이 아니겠다는 상상에 가벼운 미소도 지어졌습니다.
촘촘히 축적된 머리카락과 크고 작고 색깔을 달리한 문양으로 꾸민 한 명 한 명 자리를 차지한 그날의 놀이터는 <흡수> 시리즈를 그려나가는 모티브를 안겨주었습니다. 세월의 고초가 안겨준 동질감, 감정이입을 바탕으로 엄마들은 서로 모르는 관계일지라도 이야기를 섞어가며 좋고, 유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흡수 시리즈: 겹겹 01> 20 x 30.5cm, 종이에 과슈를 이용한 펜드로잉 2022
신생아에게 황달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갓 낳은 산모의 젖이 뭉쳐서 풀리지 않는 것은 몰랐습니다. 출산 후 집으로 돌아온 콩돌이는 수유가 부족해서 얼굴이 샛노래졌고 급하게 소아과로 아이를 안고 뛰어가던 날은 콩돌이 아빠와 엄마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하루였습니다.
두 팔에 포옥 안기는 연약하고 작은 아이의 발뒤꿈치에 바늘을 찔러 채혈을 시작하자 우리 콩돌이는 자지러지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아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저는 채혈이 끝날 때까지 아이를 붙잡고 의사 선생님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간신히 모은 채혈병이 엎어지면서 아이의 빨간 피가 바닥에 쏟아졌고, 아내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저는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려 아이의 반대 발을 잡고 다시 채혈을 시작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분유를 타서 배불리 먹이고 아내를 재웠습니다. 아내와 콩돌이를 차 뒤에 앉히고 별일 아니니 울지 말라고 소리를 치던 저는 아이와 아내가 있는 방문을 닫고 거실 의자에 앉아서 소리가 나지 않게 흐느꼈습니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어찌할 바 몰라하며 윗집 아주머니, 저의 섬유작업 설치를 도와주시던 이모뻘의 여자선생님, 그리고 늘 저희를 돌봐주시던 아버지 친구분 부인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거리가 가까운 순으로 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아주머니들이 들러서 젖을 풀어주시고, 빨래를 도와주시고, 아내를 위로해 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다행히 콩돌이는 모유와 분유를 충분히 먹은 뒤 금세 회복했고, 저희 부부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습니다.
<흡수 시리즈: 겹겹 01 & 02> 20 x 30.5 cm, 종이에 과슈를 이용한 펜드로잉 2022
콩돌이의 얼굴색이 살구빛으로 돌아오고 생활에 가장 우선순위가 된 일은 '시간 맞추어 젖과 분유를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두세 번씩 젖병을 씻어서 소독기에 넣어 돌리고 아이 면역을 키워준다는 초유와 모유는 작은 양이라고 꾸준히 먹였습니다. 흔히 '지상 최고의 날씨'를 자랑하는 캘리포니아는 한국처럼 영하 10도의 강추위를 겪을 일은 없지만 나무집의 은은한 추위가 뼛속을 파들어가곤 했습니다. 더구나 콩돌이 엄마는 추위를 잘 탔습니다. 아내는 수유속옷, 임부복, 스웨터, 이불 따위를 차곡차곡 쌓아 입고 있었고, 콩돌에게 젖을 물릴 때마다 겹겹이 쌓인 옷을 들어 올리고 벌려서 아이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환풍기 소리가 요란한 지하 작업실에서 문득 그날의 일과 겹겹이 쌓여있던 아내의 옷과 같은 엄마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해 봅니다. 생리적 보호를 위한 가볍고 얇은 한 겹, 체온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한 겹, 그 위에 한 사람으로서 적절한 품위를 위한 한 겹, 그 위에 품위의 손상을 막아주는 막으로써의 한 겹 또 그위의 겹, 그위의 겹... 사소하고 간과하기 쉬운 인격과 역할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콩돌이 엄마를 보면서, 그녀가 아이에게 생명과 건강을 선물하기 위해 그들을 해체시켜 나가는 모습은 안쓰럽고 성스러워 보였습니다.그리고 눈도 뜨지 못하는 아기는 그 따뜻한 품 안으로 얼굴을 묻어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