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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下

<아들이 아빠가 되는 드로잉> 시리즈

by 콩돌이 아빠
<대웅전 02> 38 x 55cm, 종이에 펜과 18k 금박 2022

지금으로부터 무려 15년 전, 절대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틈만 나면 바라보던 시계가 고작 10분밖에 흐르지 않던 군생활, 하지만 그만큼 중천의 태양처럼 후끈거리던 때도 없던 것 같습니다. 돌덩이같이 무거운 전투화를 신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던 연병장, 고무줄이 늘어나 줄줄 흘러내리던 속옷을 서로 빌려입던 동료들, 말하기 쑥스러웠지만 하루에 한 끼 정도는 꼭 맛있던 배식, 묘하게 코언저리에서 맴돌던 화약냄새... 마음을 주고받은 전우들을 뒤로하고 눈물을 쏟으며 걸어 나오던 그 연무문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렸습니다. 동시에 밀물처럼 차오르는 해방감은 사생활과 시간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 같았고, '군생활의 땀내 나는 노력'을 온전히 나에게 투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엇을 할지 설레었습니다.


콩돌이 아빠는 전역하던 2008년에 홍천에 있는 ‘팔봉암’으로 향했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집단생활에서 떨어져 나와서 호젓이 혼자서 또는 여여한 스님과 함께 지내고 싶었습니다. 전역하던 날도 새벽 4시까지 잔업이 끊이지 않던 바쁜 군생활을 벗어나서 지루할 정도로 할 일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책도 실컷 읽고 싶었고, 이런저런 그림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잠시 집에 있어보니 여전히 옆방의 엄마가 당신 바로 앞에 있는 선풍기를 끄라고 소리를 치셨고, 술 취한 아버지께서 어서 방에서 나와 거실에 앉아서 맥주 한잔 받으라며 '사회는 정말 무서운 곳이다'는 삶의 압박을 늘어 놓았습니다. 결국 저는 예상되는 생활반경을 벗어나야겠다고 느꼈고 여러 통의 전화 끝에 흔쾌히 몸만 와도 좋다는 절을 찾아 짐을 챙겨 현관을 나섰습니다.


제법 지방 소도시에서 오래 생활을 했기에 시외버스를 타러 가는 발걸음은 자신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홍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팔봉암으로 향하는 차편으로 옮겨 타자 산골로 안내하는 동네의 언저리는 어느덧 붉게 물들며 곧 산그림자가 사방을 전부 삼킬 것이라고 겁을 주는 듯했습니다. 아직 충만한 객기로 홍천 초행길 막차 버스에 오른 뒤 팔봉암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며 떠나가는 빈버스를 뒤로했습니다.


'산골짜기'라는 단어는 바로 이 동네에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저는 '이곳이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머쓱한 웃음을 지며 옷가방을 어깨에 둘러멨습니다. 첫 방문에 어디가나 길을 헤매는 콩돌이 아빠는 방향을 묻기 위해 저만치 오두막에서 포도를 팔던 아주머니께 ‘팔봉암’이라는 절이 어디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여기 절 없는데?”


저는 처음에 '잘못 들었나?' 싶었고 곧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해는 저물어서 돌아갈 차편도 없었고, 기세 좋게 집을 박차고 나왔는데 반나절도 안 되어 현관문을 열어 머리를 들이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 팔봉암! 저기 저 만신집이야.”


굽이진 산길 1차선 도로 건너편에는 단층의, 화장실이 외부에 독립되어 있는, 낡은 슬레이트 집이 있었고, 그 지붕에 '八峰巖'이라는 간판과 현판 중간의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팔봉암이라는 만신집에서 77세의 무당 할머니, 그리고 신내림 공부를 하던 삼촌과 10여 일을 지냈습니다. 처음으로 만신집의 스테인리스 미닫이 문을 열었을 때 온 집을 휘감고 있던 탱화와 가지러니 모셔진 좌불상들은 소름끼치게 무서웠고 아름다웠습니다.


지금도 법당에 들르면 불화에 어찌 저리 아름다운 색을 칠했고, 황금빛 부처님들은 진주알같이 그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시는지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엄이아할장내>를 그리며 유심히 바라보던 불상은, 너무 많아 눈길을 받지 못하지만, 빼곡히 벽을 메운 수백수천의 조그마한 불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젠가 제가 알고 있는 가깝고 먼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투영해서 엄지손가락 크기로 자그마한 불상들을 수천 개 쌓아 2.5미터 높이 정도의 원형 아레나를 만들고 그 안에 두어 명의 사람이 들어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아줌마들의 밥을 얻어먹고 빨아주신 옷감을 입고 살아왔는지' 생각하게 해 보는 작업을 상상하곤 합니다.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법당에 들어서면 늘 그렇듯 ‘감사함만 표현해야지.’라고 다짐하지만, 아직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감사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되뇌며


“부처님, 스스로 도울 수 있게 도와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마치 양말은 자신이 벗을 테니 열기 어려운 외투 지퍼는 아빠에게 열어달라는 우리 아들의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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