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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上

<아들이 아빠가 되는 드로잉> 시리즈

by 콩돌이 아빠
<대웅전 01> 종이에 펜과 18k 금박 2022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콩돌이 아빠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찾았습니다. 같은 반 친구의 아빠가 작은 교회의 목사님인 경우도 있었고, 함께 하계수련회를 가길 원했던 동급생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회유의 말이 되었던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또래학생들이 많다는 것'과 '"달란트"라는 것을 받아서 떡꼬치를 먹을 수 있다'는 솔깃한 이야기는 빨간색 불빛의 십자가가 있는 건물로 발길이 닿게끔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로 향하는 가장 큰 난관은 일요일 아침에 잠이 많은 어린이가 벗어날 수 없었던 아늑한 이불의 감촉이었고, 늦잠에서 깨어 TV를 켜면 볼 수 있는 주말특집 만화영화들이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할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육남매 형제들과 피붙이들을 데리고 ‘관현사’라는 절에 불공드리러 가는 것에 행복해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의미에 가슴의 응어리가 녹는듯하지만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스님들의 독경과 맑은 목탁소리는 신비한 마술사의 주문 같았습니다. 실제로 '수리수리마하수리'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이와 같이 일상에서 멀어진 풍경과 함께 절간 공양주 보살 할머니들께서 지어주시던 가마솥 밥냄새와 정성스레 무쳐 나온 무말랭이의 오독거리는 식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유년기에 보고 느낀 풍경, 냄새, 소리, 촉감은 성인이 되고 나이가 먹어가도 마르셀이 홍차와 함께 한입 베어문 마들렌같이 저를 옛 기억으로 빨아들입니다. 프루스트에게 마들렌이 있다면 제게는 무말랭이가 그렇습니다. '오독! 으드득'하고 위아래 어금니틈에서 으깨지는 말린 무의 식감에 어설프게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 난 뒤 아버지 옆에 앉아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과 함께 입속으로 밀어 넣던 절간 무말랭이와 옛날 그 대웅전의 모습, 그리고 바닥의 나무향이 '화악'하고 펼쳐집니다.


여러 일들이 삶을 스쳐 가면서 저는 20대 후반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성당을 다니며 성경 말씀에 더욱 알고픈 부분들이 있었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여러 공부를 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당시에 가장 마음에 위안이 되던 예수님의 말씀은 “열릴 때까지 두드림을 멈추지 말라.”와 “자신의 길을 떠난 가장 아름다운 양을 찾아 목자도 떠났다.”는 도마복음의 구절입니다. 천주교회의 그 묵직한 문을 밀고 들어가면 공간에 번져나가는 파이프 오르간소리는 예민하게 들뜬 제 마음을 바닥으로 가라앉혔습니다. 거룩한 연주음으로 들추어진 가슴속 앙심에 낯부끄러워졌고, 오오라같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는 햇볕은 비관의 끝에서 삶을 마감했던 커트 코베인도 위로할 수 있었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2014년쯤부터 천주교회를 다니던 빈도가 점차 줄었고, 이제는 가족과 함께 다시 법당에 가곤 합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20년 하반기, 친구의 전시를 보러 간 미술관 옆 조계사에 들러 반갑게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당시에 아기띠에 앉을 만큼 작은 아이였던 아들과 저는 법당 바닥에 엎드려 부처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들은 집에서 보았던 것보다 길고 푹신한 방석 위에 팔과 다리를 쭉 뻗으며 몸을 밀착시켰고, 저는 힐끗 본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뒤 이마를 방석에 묻고 손바닥을 뒤집어 올렸습니다. 방석을 옮기며, 절을 하며 법당 바닥에 손이 스쳤고,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흐릿했던 나무 바닥은 차갑고 울퉁불퉁했지만 다정했습니다.


‘부처님, 부처님. 제발 살려주세요. 엉겁결에 한국에 돌아왔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저는 이제 어쩌면 좋지요?’


마음속에서는 막연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압빠, 붇텨님은 화나쩌?”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아들이 뚜렷하지 않은 부처님의 표정을 보고 물었습니다.


“아니, 웃고 계신 거야. 콩돌아, 아빠처럼 이렇게 엎드려, 그리고 부처님께 ‘부처님, 우리는 행복합니다.’라고 기도해. ”


밖에서는 깜빡이를 켜지 않고 끼어드는 차에 고성을 치며 온갖 나쁜 말을 뱉고 돌아온 아버지가 친구들과 좋은 말로 사이좋게 지내라며 훈계하듯이, 저도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들에게 바라지 말고 가진 것에 행복하라는 식의 말을 했습니다. 말귀가 밝은 우리 아들은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이 조용히 그리고 어색하게 몇 번의 절을 반복했고, 저는 다시 콩돌이를 아기띠에 앉히고 조심스레 대웅전을 걸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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