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돼지의 왕> 리뷰
티빙 오리지널 작품인 <돼지의 왕>을 처음 보았을 때 연상호 감독의 원작과는 너무 다른 각색에 상당히 당황했었다. 원작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작품에 복수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상당히 다른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작은 교내 안에서 벌어졌던 폭력으로 이뤄진 수직적 구조와 계급적 상황의 오묘함은 제쳐두고, 이 작품의 초반부는 복수와 스릴러라는 형식을 빌려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훨씬 재밌게 전개된다.
연상호의 원작 <돼지의 왕>은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아이들을 돼지로, 이를 괴롭히는 일진들을 사냥개로 묘사하면서 넘어설 수 없는 두 부류의 수직적 관계를 오묘하게 그려낸 수작 애니메이션이다. 무엇보다 약자들 사이에서 등장한 싸움꾼 철이를 통해 학폭 피해자들만의 관계를 새롭게 드러내는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피해 학생들의 열등감과 패배감을 뒤바꿔줄 하나의 희망이었던 철이, 일명 '돼지의 왕'을 통해 그들의 그릇된 열망을 드러내지만, 결국 돼지는 사냥개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보여준 비극적인 작품이었다.
드라마 <돼지의 왕>은 이들의 그릇된 열망을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 나가는 전개를 보인다. 무엇보다 '돼지의 왕' 철이가 끝내 이루지 못했던 복수라는 키워드를 집어넣으면서,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탈바꿈한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개와 돼지의 수직적 구조를 꼬집었던 연상호의 이야기에 이를 넘어설 파괴적인 복수를 가미한 것이다. 결국 원작의 메시지는 조금 희석되지만, 반대로 복수의 카타르시스와 쾌감은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는 드라마로서 매력적인 기승전결을 보여주면서, 결과적으로 오락적인 재미에서 원작을 능가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선사하게 된다. 탁월한 선택이자 변주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개와 돼지로 분류하여 계급적인 사회의 모습을 비판했던 원작의 매력을 이 작품은 복수라는 키워드를 넣었음에도 온전히 잃지 않는다. 황경민과 정종석이 원작보다 더 나은 성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개와 돼지로서의 관계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20년 전 중학교 시절의 굴욕적 모습을 원작 이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브라운 톤으로 대비시킨 과거의 신은 어린 배우들의 캐스팅부터 연기, 그리고 학원 폭력과 정치적 관계의 디테일한 모습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구현해 낸다. 무엇보다 '돼지의 왕' 철이의 몰락을 원작보다 더 잔인하게 그려내면서, 희석되었던 원작의 메시지를 성인들의 복수극에 끝까지 각인시킨다. 원작의 상징과도 같았던 개와 돼지의 수직적 구조를 제대로 캐치해 낸 놀라운 신들의 연속이었다. 어른이 된 황경민의 그릇된 복수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결국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복수를 하는 황경민의 입장과 후회하고 반성하는 가해자의 입장을 동시에 그려내면서, 이 둘의 관계를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만으로 나누지 않는다. 황경민의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 역시 피해자이자 또 다른 가해자임을 보여준다. 과거의 철이의 반격에는 놀라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지만, 황경민의 복수에는 크게 대리 만족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사회의 현실적인 모순을 그려왔던 연상호의 이전 작품들처럼, 그 누구도 선과 악이 아닌 이 사회의 피해자들처럼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비슷한 소재의 <더 글로리>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장점은 바로 학원 액션 신들이다. 이미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학원 액션물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처음 보는 어린 배우들의 날 것 같은 학원 액션신은 상상 이상이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고 리얼리티 한 학원 액션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굴욕적인 학교생활을 했던 경민과 종석에 대한 몰입과 철이의 파괴적인 도전이 더해지면서 얻게 되는 묘한 카타르시스적인 쾌감도 있었을 것이다. 시청자마저 보편적인 돼지로서 철이의 '왕의 등극'을 바라게 되는 묘한 동질감도 한몫한다. 무엇보다 이 어린 소년들의 연기가 너무나 놀랍다.
이 작품은 아쉬운 옥에 티 하나가 작품의 완성도를 좀 먹으면서, 이 작품이 걸작으로 가는 길을 끊임없이 훼방 놓는다. 바로 채정안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웃고 있는 인상 때문인지, 형사라는 캐릭터에 이미지 매치가 전혀 되지 않으면서 몰입감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아님에도 형사라는 캐릭터에 매치가 안 되면서, 굉장히 연기를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방영했던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김소진과 비교해 보면 정말 큰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돼지의 왕>은 캐스팅마저 너무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저 관찰자 역할에 머물렀던 단 하나의 여성 캐릭터의 캐스팅에 실패하면서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정말로 아쉬운 캐스팅이다.
<돼지의 왕>은 OTT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티빙의 경쟁력을 한 것 끌어올리는 작품이었다. 불필요해 보였던 잔인한 표현 수위와 채정안의 연기가 끝까지 아쉬움으로 남지만, 오락적으로 봤을 때 오랜만에 몰입도를 높여준 매력적인 스릴러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연상호 특유의 사회적 메시지를 잃지 않으면서, 복수극으로서의 매력을 완벽히 가져간 이 작품의 원작 비틀기는 상당히 훌륭했다. <돼지의 왕>은 OTT 드라마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살린 이상적인 스릴러 작품이었다.
20년대 좋은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