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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아 Apr 30. 2024

챕터 5 균열



나는 나를 미워했다. 나를 싫어할 때도 많았다. 내가 나에게 선을 긋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내게 갖는 이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난 나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냥, '백이은'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이 마음만큼은 절대 놓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절대 놓아선 안되었다. 그러나 두 마음이 부딪힐 때면 나는 크게 상처를 받았고, 깊게 실망 했다. 그러나 또 그 반복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살아가게 하고 있었다.




"어? 우아 너 필통 예쁘다~"

"오! 진짜? 어디서 샀어?"


"아, 아빠가 사주셔서.. 잘 몰라."


"이은아, 네 거 필통 나랑 일주일만 바꾸면 안 돼?"

"응..? 필통을?"

"응~~ 아니 너무 내가 가지고 싶었던 거랑 비슷해가지고!"

"아.."

"나 가끔 친구들이랑 이것저것 바꾸면서 쓰거든 ㅎㅎ 새로 산 것 같은 느낌 들고 좋더라구~ 어때?"

"아.. 안될 것 같아. 미안해."

"아 그래.. 그래, 뭐 알겠어."


"뭐야. 재수 없어."


짧게 울리는 말을 끝으로 잠에서 깼다.


'아.. 꿈..'


한동안 후회했던 일이 꿈으로 나왔다. 마지막에 '재수 없다.'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 애가 나를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스스로 단정 짓고 있어서 였을까. 그 말이 강렬하게 꽂히며 나를 깨웠다.


전학을 오고 초반, 내 뒷자리에 앉은 아이는 가끔 지우개나 수정테이프 등을 빌려 갔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돌려주지 않았다. 고민을 하다가 말을 하면 '아~ 까먹고 있었다~' 하면서 돌려주었지만 대부분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수업 시간에 잘 조는 아이였기 때문에 항상 필기를 잘 하지 못했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한 번만 보여줄 수 있냐고 부탁했지만 한 번은 거의 매번이 되었다. 그러다 한 달 정도가 흘렀을 때 필통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내가 거절한 그 후로 나에게 아무것도 빌리지 않았고, 필기를 보여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아이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지우개와 수정테이프를 잃어버렸을 때도 필기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도 말이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필통에 관해서도 충분히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서히 마음이 누그러지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그 아이와는 그렇게 끝이 났다. 뭔가 허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필통을 바꿔주지 않았던 것은 그것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이은아, 잠깐 들어가도 돼?"

"아, 응."


숙제를 하고 있는데, 조용히 아빠가 들어왔다. '숙제하는 중이야?'라고 말을 걸면서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이게 뭐야?"

"필통. 너 필통 바꿔야 돼, 저게 뭐냐 다 헤져서."

"아.."

"엄마는 더 쓸 수 있다고 안 사줄 테니까, 아빠가 사 왔지."

"고마워, 아빠."

"그래, 숙제마저 하고~ 너무 늦게까지 하진 말아. 뭐 숙제 안 해갈 때도 있는 거지~"

"응.. ㅎ 알겠어."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아빠는 방을 나갔다. 쇼핑백 안에 든 필통의 포장을 뜯었다. 검은 고양이가 그려져있는 필통이었다.




"엄마 혹시 고양이.. 일 알아?"

"고양이..? 무슨 고양이? ...! 아~ 전에 집 앞에 찾아왔다던? 응 알지~ 외할머니가 말해줘서."

"그럼 아빠도 알아?"

"어 알지 ~ 그날~ 예전에 너 산책 갔다 온 날에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묻길래, 혹시 공터에 간 건가? 싶어서 얘기하다가 말했지~"

"아.."

"나 그날 네 아빠한테 한 소리 들었다.. 그걸 왜 이제서야 자기한테 얘기하냐고."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빠는 엄마 몰래 내게 조금씩 용돈을 주셨고, 핸드폰이 뭐가 필요하냐며 절대 안 사주겠다던 엄마를 설득하고 설득해서 내게 중학교 선물로 주셨다. 숙제를 하고 있으면 몰래 들어와 과자를 놓고 가기도 했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절대 시키지 않았다.

엄마는 지나간 일을 잘 놓아주지 못했지만 아빠는 훌훌 잘 털어내고 빨리 일어나는 분이셨다. 아빠는 단단한 사람이었고, 멋진 사람이었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가끔은 내가 아빠 자식이 맞을까.. 하는 웃기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 그랬던 거 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빠에겐 내 속마음을 잘 말하지 못했다. 아마 아빠에겐 내가 벽을 세운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나도 아빠처럼 뭐든 미련 없이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무언가가 자신의 곁을 떠나가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다시 또 다른 것에서 자신을 위해 행복을 찾는 그런 사람.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또 찾아온 새로움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말이다.




'만약 내가 그때 필통을 바꿔줬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을까. 복잡한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어젯밤, 핸드폰을 잡고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고민을 하면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지만 어떻게 물어볼지 몰라서 포기했다. 그렇게 이틀 동안 민서와 지유에게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계속 생각하다가 늦게 잠에 들었다.


사실 한동안은 민서가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금방 이러한 사이가 끝나버릴까 불안하기도 했다. 나 같아도 누군가를 사귈 때 ‘나 같은’ 사람하고는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말도 행동도 표정도 모든 것이 어색한 사람 말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어려웠다.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마저도 나에겐 한없이 두려운 말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다는 것이 무척 고맙고 하루를 기분 좋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욱, 시작하지 못해서 후회로 남은 순간들과 잘 끝맺지 못한 순간들에 스스로 매번 삼키던 말들은 쓰디쓴 자책으로 남겨졌고,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 짙은 외로움으로 쏟아질 때마다 견딜 수 없었다. 그 쓴 말들이 제발 그 어떠한 것들에 파묻혀서라도 감춰지길 바랐다.


그러니까 나도 먼저 다가가야 했다. 그런 용기와 모습을 갖춰야 했다. 계속 먼저 다가와 주길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른다. 물론 억지로 다가가는 것이 좋은 행동은 아닐 수도 있지만 애들의 표정과 눈빛을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유를 알고 싶었다.




교실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굳게 다짐한 듯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민서와 지유는 문소리에 살짝 쳐다보더니 이내 눈길을 돌리며 대화를 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호흡을 깊게 하고 애들을 찾아가서 먼저 말을 건넸다.


"무슨 얘기 해?"

"아.. 아.. 어제 본 드라마 얘기.. ㅎ"

"아~ 그래? 조금 있다가 나한테도 얘기해 줘."

"그래.. ㅎ"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고 책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말을 걸자 민서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고, 지유는 뭔가 표정이 굳어 보였다.


'괜한 짓을 한 걸까..?'

'아니야.. 잘.. 한 거야. 잘했어.'


집중할 수 없는 수업 시간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소리가 진정되도록 손을 꼭 맞잡았다. 그리고 그때 민서가 말을 걸어왔다.


"이은아, 밥 먹으러 가자."


'하.. 다행이다.'


그 순간 속으로 짧게 안도의 한숨이 뱉어졌다. 그런데 그러한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어딘가 비참한 한숨이 더 깊게 내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민서와 지유는 집이 같은 방향이었기 때문에 매일 같이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다른 방향이었던 나는 오늘따라 과하게 손을 흔들면서 내일 보자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소화제 하나를 사 먹었다.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시 돌아왔다. 아니, 이게 다시 돌아온 것이 맞는 걸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유를 묻는 것이 맞는 걸까. 그냥 이렇게 내버려두는 것이 맞는 걸까. 다시 예전처럼 대화만 할 수 있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마다 민서와 지유에게 찾아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애들도 점차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았고, 어떤 날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고 떠들며 대화를 했다. 그러나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마음 한 쪽이 계속 불편했다. 민서도 지유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뭐랄까.. 그 둘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래, 괜히 물어봤다가 또 틀어지면 어떡해. 그냥 모른 척 넘어가자.'


괜찮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마음의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은아, 선생님이 몇 쪽까지 숙제 내주셨지?"

"어.. 16쪽까지!"

"오~ 역시 너는 알 줄 알았어 ㅎㅎ 나는 지금 시작하는데 너는?"

"나도 지금 하고 있어."

"아~ 진짜 하기 싫다..ㅠㅠ 우리 조금만 수다 떨래?"

"ㅎㅎ 그래."


민서는 토요일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이런 일이 있었고, 화가 났고 그런데 또 이것 때문에 풀어졌고 하면서, 꼭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말을 했다.


"이은아, 너는 진짜 공감 왕이야. 너한테는 뭐든 얘기하게 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네가 괜찮아지면 그걸로 충분하지."

"너는 진짜.. 너무 착해!!"

"ㅎㅎ.. 아니야."


민서의 말을 듣는데, 그때 갑자기 이유를 물어봐야 할 것만 같았다. 뭔가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근데 민서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전에.. 나랑 잠깐 얘기 안한 적 있었잖아.. 그거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 흠.. 어떻게 말을 해야 하지.."


민서는 우왕좌왕하면서 말을 시작하다 말고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나중에 답해줘도 된다고 했지만 민서는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게.. 그러니까.. 지유가 좀 질투? 가 났나 봐."

"질투..?"

"응.."

"아.."

"아무튼 그래서.. 솔직히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내가 사이에 끼인 기분이랄까..? 지유도 안 그래 보이는데 낯을 좀 가리는 편이거든. 너랑 내가 너무 친해 보여서 그게 은근히 마음이 불편했나 봐..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자기를 더 먼저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조금 서운했나봐. 걔도 반에 아는 애가 나밖에 없었거든.

"응..."

"그러다가.. 아침에 널 딱 만났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피해졌어.. 그리고 지유도.. 뭔가 너를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고.."

"아.. 그래..?"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괜찮아졌으니까~ 우리 앞으로 같이 마지막 학교생활 잘 보내보자!"

".... 그래.."




'민서에게 이유를 물었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더 혼란스러운 걸까. 민서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로는 이해가 갔지만 마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망감? 서운함? 모르겠다. 나를 모른척하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거였을까.'




사실 난 지유의 행동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민서가 지유를 내게 소개해 줬을 때, 살짝 불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냥 낯을 가려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그 둘의 사이를 질투했었던 것 같다. 민서 주변에 있는 친구들과 얘기한 적은 꽤 있었지만 지유는 뭔가 달랐다. 지유와 민서는 아주 견고해 보였다. 민서는 누구와도 잘 지냈고, 내가 없었어도 다른 누군가와 친구가 되었을 거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와 제일 얘기를 많이 나누니까, 민서의 '친한 친구'가 나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 마음으로 지유를 마주하게 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었다. 어쩌면 지유도 민서를 나처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민서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민서에게 답변을 듣고 난 후, 나는 지유보다 민서에게 더 충격을 받았다.


예전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지만 왜인지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 가기 전 날마다 내일은 또 어떻게 애들에게 말을 걸까 생각했고, 교실로 들어서기 전까지 엄청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가끔 먼저 밝게 인사해 주는 애들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그러고 나서는 풀어진 긴장감에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그리고 어쩐지 이유를 알게 된 후로부터 나도 모르게 애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내일은 민서가 학교 대표로 대회를 나가서 학교에 없었다. 지유와 단둘이서만 있는 것은 처음이기도 했고, 그날의 이유를 듣고 나니까 괜히 전날부터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지유가 나를 보더니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 이은! 왔어?"

"응..ㅎㅎ"

"오늘 너랑 나랑만 있네 ㅎㅎ 민서는 잘 갔으려나?"

"그러게, 잘하고 왔으면 좋겠다."


"이은! 너 이거 봤어?"

"이은아 너 파란 볼펜 남는 거 있어?"

"밥 먹으러 가자~"

"아 진짜 졸려 죽는 줄 알았다 ㅠㅠ"

"야 너도 이거 보지?"

"헐.. 음악 취향 완전 나랑 같잖아~~!"


걱정한 것이 조금은 창피하게도 지유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은 많이 어색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걱정할 필요 없이 내게 말을 걸었고, 우리는 꽤 재밌게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까지 지유와 나는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었다. 언제나 단톡방에서만 말을 했었는데, 그날 이후, 지유는 내게 따로 메시지를 보냈고, 가끔 통화를 하기도 했다. 지유는 은근히 여린 면이 있었고, 말하기 힘든 부분까지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또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참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이미 지난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건..

우리는 잘 지냈다. 민서와도 지유와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더 가까워지고 더 친해졌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느 날부터 지유가 달라진 것 같았다. 남들이 보기엔 별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겠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유가 민서를 대하는 모습이 살짝 어색했고, 어딘가 불편한 듯 보였다. 그러나 민서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신경이 쓰였지만 괜히 혼자 복잡하게 만들면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그날 저녁에 지유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지유는 조금은 망설이다가 이내 다짐한 듯 민서한테 서운한 점을 내게 털어놓았다.


'어..?'

'.. 뭐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혼자 남겨졌을 때 느꼈던 감정이 느껴졌다.


민서는 가끔 무심하게 보일 수도 있는 면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누군가는 털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또 누군가는 섬세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마 지유에게는 민서의 그런 면이 섬세하지 못하다고 받아들여졌나 보다. 지유는 꽤 오랫동안 묵혀 왔던 감정을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민서에게 솔직하게 얘기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지유는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통화를 하는 내내 나는 지유의 말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지유의 말이 너무 귀에 잘 들어왔기 때문에 어지러웠던 거 일지도 모르겠다.


"뭐야.."


통화를 끝내고 어지러운 마음을 짧게 토해냈다. 그런데 민서에게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은아 통화 중이네? 너한테 할 말 있어서 전화했는데 ㅎㅎ 그럼 내일 만나서 두 배로 이야기해 줘야지!'


나는 민서의 메시지를 보고 순간 심장이 움찔했다. 그리고 지유의 이야기를 민서에게 전할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 ㅎㅎ 응 잠깐 통화 중이었어. 내일 봐!'




다음날, 지유는 평소보다 늦게 학교에 왔다. 그리고 나에게만 인사를 하고 민서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어느 정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되니까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제 지유가 내게 했던 전화와 민서가 내게 보냈던 메시지가 번갈아가면서 나를 괴롭혔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매초 나를 찾아와서 쿡쿡 쑤셔댔다.


민서와 지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유는 쉬는 시간에 나를 찾아왔고, 민서는 처음엔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답답한 마음만 가득했다. 지유가 나를 찾아오기 전에 애들에게 다가갔지만 지유는 같이 화장실을 가자며 나를 돌아세웠다. 불편한 점심시간이 흐르고, 지유가 잠깐 교무실에 갔을 때 민서를 찾아갔지만 민서는 졸리다며 나와도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엄청 멀게만 느껴졌다.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짝씩 떼면서 걷고 있는데, 지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은! 집 잘 가고 있어?"

"어~ 응."

"오늘 같이 버스 타자니까~"

"아.. 시간이 애매해서 그랬어. 다음에 같이 기다려줄게."

"꼭이다 ㅎㅎ"

"응.. ㅎ"


조금의 정적이 흐르고, 지유가 말을 이었다.


"너 어떻게 할 거야?"

"응? 뭐를?"

"민서랑."

"뭐.. 뭘.. 뭘 어떻게.."

"나는 민서랑 화해 안 할 거야."

".. 어?!"

"아니, 솔직히 네 말대로 서운한 거 먼저 말했어도 돼. 근데, 오늘 안 봤어? 아무렇지도 않잖아. 아니, 뭔가 좀 말을 걸려는 시도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걔는 내가 서운한 거 말을 해도 신경도 안 쓸 거야. 오늘처럼."

"아니 그래도.."


"그리고.. 이거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민서 걔 네 얘기 한 적 있어. 같이 학원 다닐 때.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너였더라."

"... 내 얘기..?"

"아 별건 아니고.. 어차피 너는 아무리 얘기해 봤자 본인 마음 이해 못 할 거래. 학원도 여러 개 안 다니고, 방학도 방학처럼 누리는데, 자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냐고. 뭔가.. 솔직히 좀.. 짜증 났다고."

"....."

"아무튼 나는 화해할 생각 없으니까.. 하,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선택해 줬으면 좋겠어. 어쨌든 같이 다니긴 힘들 테니까."

"... 응, 그래."


전화가 끊김과 동시에 걸음도 멈췄다.

'짜증 났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택'이라는 말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이런 일에 어울리는 단어가 아닌 것 같다.

정말.. 사실일까? 오랜 시간 망설이면서 다듬고 다듬어서 건넨 말이 결국 짜증 나는 말이 되었다. 민서에게 진짜냐고 물어봐야 할까. 만약 진짜라면 어떡하지. 무섭다.'




다음 날, 밤새 고민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학교에 도착했다. 어떡해야 할까 복잡한 마음으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딱 민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민서가 내 눈을 피하며 나를 모른척했던 그때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부터 꾸준히 나를 괴롭히던 홀로 남겨졌을 때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는 민서의 눈을 피했다.


우리가 없어도 민서는 잘 지내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민서를 쳐다보진 않았지만 매 순간 신경이 쓰였고, 마음이 갔고,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지만 내가 내린 선택이었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이런 마음을 갖는 것도 참 양심이 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했다.

민서도 지유도 내겐 친구였지만 낯설었다. '친구'라는 말이 더 이상은 어울리지 않는 사이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지유와 함께 다니면서 지유 눈치를 보게 되었고, 민서를 신경 쓰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면 나를 피하던 민서의 눈빛을 억지로 기억해 냈다.




'누군가를 혼자 두는 일 또한 내가 혼자 남겨지는 것만큼 얼마든지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울 수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난 왜 이러한 선택 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 갑자기 내가 너무 싫었다. 난 이 선택을 후회할까? 또 후회하는 일이 내게 하나 더 쌓일까?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내렸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지유는 주말마다 내게 여기저기 놀러 가자고 말을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는 일이 많았다. 지유와 노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난 돈이 없었다. 용돈이 부족하다고 말하면 본인이 사주겠다거나 빌려주겠다고 말을 했지만 매번 얻어먹는 것도 굉장히 미안한 일이었고, 빌려준다고 한들 언제 갚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초반에는 몇 번 만나서 놀았지만 그 이후로는 부모님 얘기를 하면서 약속을 잡지 않았다.


한 달이 좀 지났을까. 등교를 했더니, 교실에서 민서와 지유가 함께 웃으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순간 무슨 상황인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벙쪄있는데 그 모습을 본 지유가 나를 반갑게 불렀다.


"아! 이은!"


"어..! 안녕 ㅎㅎ"

나는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야 일로와~"


지유는 나를 불렀고,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애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무슨 상황인 건지 생각했다.


민서와 나는 꽤 오랜 기간 그 어떤 대화도 메시지도 주고받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먼저 연락을 해볼까 고민했지만 지유와 연락을 하고 나면 그 고민을 애써 접었다. 그런데 엄청 오랜만에 얘기를 나누는 거였는데도 민서는 내게 주말에 뭐 했냐고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또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사이가 좋은 것처럼 그렇게 또 잘 지냈다.




친구 사이에서 우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일 수도 있지만 분명 어떤 관계든 수평관계는 없을 것 같았다. 민서와 지유는 시소에 탄 것처럼 왔다 갔다 거리고 있었고, 처음에는 지유가 민서에게 맞춰주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나는 안절부절못한 시선을 따라 서서히 부서지는 내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미 생긴 균열을 없앨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언제 또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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