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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아 May 02. 2024

챕터 6 차은재.



"백이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헐 맞네 백이은!"

"...?"

"야 나 기억 안 나? 아, 안 나려나.. 나 차은재!"


'차은재..? 차은재..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 아?'


속으로 이름을 곱씹다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은 것처럼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 아. 어~ 어."

"와 ㅋㅋ 오랜만이다. 너 여기 다니는구나."

"아, 응."

"나는 여기 올해 전학 왔어."

"아.. 그렇구나..!"

"ㅋㅋ 암튼 야 반갑다 진짜!"

"어.. 그러니까 ㅎ 반갑다."


반가운 듯 또 어딘가 어색한 듯 우물쭈물 거리며 인사를 주고받는 시간은 수업 종이 울리며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아..! 수업 종 울렸네.."

"아 그러게 가야겠다 이제.."

"수업 잘 들어 또 봐 백이은!"

"어.. 잘 가..!"


교실로 돌아가던 차은재는 갑자기 다시 돌아와 내게 또 말을 건넸다.


"아..! 백이은 너 아직 거기 살아?"

"어.. 응..!"

"근데 왜 자주 못 봤지?"


차은재는 '글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나를 보더니, 씩 웃어 보이면서 손을 흔들었다.


"ㅋㅋㅋ 아무튼 또 봐."

"그래."


차은재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지유와 민서가 차은재가 가자마자 나를 쿡쿡 건드리며 누구냐고 물었다.


"야!! 뭐야??"

"헐 누구야?"

"아.. 초등학교 동창이야."


"헐 미친. 키 개 큰데?"

"야 잘생겼는데?!"

"야 친했어?"

"꽤 친해 보이는데?"

"아니야 얘기해 본 적도 별로 없어.. ㅎ"


"야야 그게 뭐가 중요해. 이렇게 지금 딱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앞으로 친해지면 되는 거야!"

"와~ 나도 저런 남사친 있었으면 좋겠다.."

"야 이은아 우리도 소개해 주라! 어? 아까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잖아."

"아.. 그래.."


애들은 계속 내게 더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지만 얘기해 본 적도 별로 없어서 딱히 이렇다 할 것도 없다고 말을 했다. 애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이제 다시 알게 됐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친해지면 되겠다고 좋아했고, 본인들한테도 소개해달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백이은!"

"응..?"

"아프다더니 몸은 괜찮아?"

"아.. 응.."

"너 저번달에도 감기 때문에 학교 안 나온 적 있지 않았냐?"

"응.."


차은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 잠깐만 기다려봐."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리로 가, 책상 밑 좁은 공간에서 단팥빵을 꺼내왔다.


"너 팥칼국수 좋아하면 단팥빵도 좋아해?"

"..."

"이거 먹어. 조금 있다가 우유랑 같이. 잘 먹어야 안 아프다~"

"아..! 고마워."


내 기억 속에 차은재는 좋은 아이였다.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애들도 다 좋아했고 또 겉도는 아이들도 챙겼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반 아이들 중에서도 모습이 기억에 남는 애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차은재 였다. 아마도 키가 제일 커서였던 것 같다. 차은재와는 정말 짧은 시간을 같이 학교에 다녔었지만 내게 자주 말을 건넸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차은재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며칠 남은 학교를 가지 못했다. 아빠는 학교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더 중요하다면서 쉬게 했고, 엄마는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하면서도 아빠의 말에 동의했다. 방학 숙제는 어떻게 하냐고 말하는 엄마 옆에서 아빠는 방학 숙제는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엄마를 힐끗 보고는, 엄마의 말은 신경 쓰지 말라고 나를 향해서 조용히 손짓했다. 엄마는 아빠의 어깨를 살짝 밀며 째려보았고, 아빠는 괜찮다며 또 한마디 보탰다. 그렇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밖에 나간 아빠는 돌아와서 친구가 왔다며 내가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음속으로 '올 친구가 없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밖으로 나갔더니, 차은재가 서 있었다.


"안녕~"

"어..! 안녕."

"몸은 괜찮아?"

"아.. 응 괜찮아졌어."


차은재는 짧게 말을 하고 책가방 속에서 종이를 꺼내서 내게 주었다.


"이거 방학 숙제야."

"아..! 고마워."


그러더니 쭈뼛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 나 전학 가거든.. 다음 학년에는 못 보겠다."

"아.. 그래?"

"응.. 뭐.. 아무튼 건강해라.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또 보자."

"응.. 그래.. 아! 이거 진짜 고마워..!"


차은재는 별거 아니란 듯이 웃어 보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했다.


"아! 그리고 내 이름 '차은재' 야."

"... 알아."

"오? 진짜? 어..?! 오..! 고마워.. ㅎ"


이름을 아는 게 왜 고마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다는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서로를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부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사실 그때 이름을 정확하게 알게 된 거였지만 차마 이제서야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는 없었다. 그건..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잘 지내라 백이은! 안녕!"

"응..! 너도..!"


차은재는 힘차게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했다. 그게 차은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누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차은재였다.


"야 집에 가?"

"응."

"근데 왜 이쪽으로 가?"

"우리 집 이쪽인데?"

"아니, 버스정류장은 저기잖아."

"아.. 나 걸어 다녀."

"헐 걸어 다닌다고?"

"응. 30분 밖에 안 걸리잖아."

"와.. 아..! 그래서 내가 너랑 더 안 마주쳤구나..!"


차은재는 무언가 엄청난 것을 깨달은 듯이 말을 하고선 오늘은 자기도 걸어가겠다고 했다. 나는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그러라고 했고 그렇게 우리는 같이 하교를 했다.


"쭉 여기서 살았어?"

"아니, 나도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어."

"아 진짜? 언제 왔는데?"

"중2 때."

"아~ 너도 온 지 얼마 안 됐구나.."


"나 예전부터 좀 궁금한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돼?"

"응? 어.. 그래."

"너.. 내가 방학 숙제 가져다줬을 때 있잖아. 그때 내 이름 알려줬을 때 알고 있다고 했잖아. 진짜 알았어?"

"아..! 저기 그게.."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데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차은재는 양손을 흔들면서 본인이 더 당황해하다가 갑자기 막 웃었다.


"야.. 야 장난이야 장난..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ㅋㅋㅋㅋ"

"아.. 미안.. ㅎ"

"아니야 ㅋㅋ 미안할 것까지야 없지. 그냥 ~ 혹시나 했는데 역시 몰랐다는 게 솔직히 살짝 서운하다? 딱 이 정도."

"대충은 알고 있었어.. 정확히 안 건 네가 말해줬을 때였긴 하지만.. ㅎ"

"ㅋㅋㅋㅋㅋㅋㅋㅋ 알겠어 알겠어."


".... 그럼 나도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너.. 내가 팥칼국수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팥칼국수? 아~ 그거? 교실 뒤편에 적혀 있었잖아. 그거 보고 알았지. 다른 애들은 다 햄버거 피자 스파게티 고기 초콜릿 케이크 막 이런 거 적었는데 넌 '팥칼국수'라고 적었더라고 신기해서 바로 외워졌어. 너는 다른 애들 거 안 읽어봤어?"

"응.."

"와.. 그럼 내 것도 안 읽어봤겠네.. 아 그래서 내 이름도 잘 몰랐구나.."

"아니..! 그거는 다른 이야기고.. 또 그 다른 애들 거가 궁금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내 거 적은 게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

"ㅋㅋㅋㅋ 또 그 표정 ㅋㅋ 아 웃긴다ㅋㅋㅋ 근데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내가 적은 거 시간 지나고 보니까 좀 오글거리기도 하더라."


내가 또 당황하는 거 같으니까 차은재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또 막 웃었다. 그리고 초등학생 때 교실 뒤편에 적었던 소개 내용과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조금은 창피하다고 생각했었던 일들도 몇 개 들려주었다. 우리는 드문드문 찾아오는 정적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같이 걸어갔다. 그런데 그 정적이 어색하다거나 차갑지 않았다.


차은재의 집은 우리 집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우리 집이 먼저 보였고 그 다음이 차은재 집이었다. 집 앞에 다다르자 나는 '잘 가.'라고 인사를 했지만 차은재는 '잠깐만.' 이라며 불러 세우더니, 핸드폰 번호를 물어봤다. 나는 번호를 불러주었고, 차은재는 내게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어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날 밤, 아침에도 걸어가냐는 차은재의 메시지에 아침에는 버스를 탄다고 답변을 했다. 몇 시 차를 타고 가냐고 묻는 차은재에게 버스 시간을 알려주고, 내일 보자는 차은재의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차은재는 말이 꽤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오늘 차은재 때문에 몇 번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차은재가 막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오랜 친구랑 장난치는 기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다.'




그날부터 자연스럽게 차은재는 나와 함께 등하교를 했다. 차은재와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걔는 항상 저벅저벅 다가와 반가워하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항상 내 옆에는 민서와 지유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차은재와 애들도 금방 친해졌다.


"이은아 너 요새 은재랑 같이 집에 가?"

"응. 같은 방향이라서."

"아.. 그래? 그러면 등교도 같이해?"

"응.. ㅎ"

"뭐야~ 둘이 되게 친해졌나 보다. 전에 만났을 때는 안 친하다고 했었잖아~"

"아.. 뭐 얘기하다 보니까 조금씩 ..ㅎㅎ"


애들이 차은재를 알고 나서부터 가끔 나에게 차은재에 대해서 물어보기는 했지만 차은재와 애들이 점점 친해지고부터는 민서만 내게 차은재에 대해 드문드문 물어봤다. 질문의 대부분은 우리 집이랑 차은재네 집이랑 많이 가깝냐거나 혹시 주말에도 둘이 만나냐거나 연락을 자주 하냐거나.. 이런 두루뭉술한 질문들이었다.


"이은아 우리 먼저 갈게~ 내일 봐!"


내일 보자면서 손을 흔드는 민서와 지유를 향해서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민서가 활짝 웃으면서 양손을 들고 격하게 흔들며 인사를 보냈다. '뭐지?' 싶은 마음에 뒤를 보았더니, 멀리서부터 양손을 크게 흔들면서 오고 있는 차은재가 보였다.


"백이은~ 집에 가자!"

"그래 ㅎㅎ"


차은재는 걸어가는 민서와 지유를 뒤돌아보더니, 갑자기 애들이 내 제일 친한 친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순간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침묵을 느낀 걸까. 차은재는 그런 내 표정에 당황한 듯이 3학년 때 전학을 와서 그런지 애들이랑 잘 지내긴 하지만 엄청 편한 사이는 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잘.. 모르겠어.."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숨겨둔 고민을 말해버렸다.


"그럴 수도 있지. 꼭 정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갑자기 속마음이 튀어나와서 당황스러웠는데, 차은재는 그럴 수도 있다면서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솔직히 본인도 정말 친하다 싶은 그런 친구는 아직 없는 것 같다면서, 그런 사이는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신중하게 답을 해주는 그런 차은재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너도 네 속마음 얘기해 줬으니까, 나도 하나 말해 줄게."


차은재는 조금 진지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달라진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차은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 초등학생 때 갑자기 전학 왜 간 줄 알아?"

"왜 갔는데..?"

"엄마가 돌아가셨거든."

"어?... 아.."


"아빠가 엄마 생각이 나서 여기에 못 있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갔지."


차은재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나는 느꼈다.


".. 근데 멀어진다고 잊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빠가 다시 돌아가지고 하더라, 엄마가 보고 싶다고."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나는 그저 묵묵히 차은재의 얘기를 들어줄 뿐이었다. 차은재는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가 떠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떠나고 나면 다신 못 보게 된다는 것도.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당연히 힘들었지만 무너지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자신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차은재의 아빠는 차은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고 했다. 문득 어린 시절의 차은재가 왜 그리도 어른스러웠는지 알게 되었다.


"힘들었겠다.. 너도, 네 아빠도.."

"응.. 그땐 조금.. 아니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차은재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슬프게 웃어 보였다.


"애써 괜찮아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슬프면 슬픈 만큼 슬퍼해도 돼.."


천천히, 차은재가 아프지 않게. 또 더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건넨 말이었다. 어딘가 엉성하고 또 어딘가 허술한 위로였지만 차은재는 그런 내 위로에도 웃어주었다.


"내일 보자. 백이은."

"응. 잘 가..!"


내일 보자는 차은재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 멀어지는 차은재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차은재를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놀라긴 했었지만 살짝 반가운 마음도 들었었다. 또 걸어서 집에 가겠다던 차은재의 말에 당황하기도 했었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같이 등하교 하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어쩐지.. 조금은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갈수록 차은재의 다른 모습들을 알게 된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차은재가 많이 편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차은재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은재..! 오늘 쉽지 않은 얘기였을 텐데 나한테 말해줘서 고마워.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만약 문득 힘들 때가 오면 내게 언제든 얘기해도 좋아..! 내일 보자.'


자기 전에 차은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차은재는 '너답다 ㅋㅋ 고마워 백이은. 잘 자.'라고 답을 해왔다.




어느 순간부터 민서와 지유가 둘이서만 대화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내가 예민한 거겠지, 생각하려고 했지만 분명 눈에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부터 지유가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복잡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담담했다. 문득 그냥 내버려 둘까, 싶은 마음까지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고민 끝에 지유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이 흘러도 답이 없었다.


결국 민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서야."

"응, 무슨 일이야?"

"저기.. 혹시 지유..한테 무슨 일 있어?"

".. 아니? 왜?"

"그래.. 아니 뭔가,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아.. 뭔가.. 음.. 내가 말하기는 좀 그래서.. 나도 해줄 말이 없다.."

"아 그래.. 알겠어. 내일 보자."


민서는 말하기가 곤란한 듯 얼버무렸고, 나는 그냥 직접 지유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지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다가갔지만 지유는 여전히 나를 불편해하면서 조금 있다가 말하자고 전했고, 다음 쉬는 시간에 찾아갔지만 지유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살짝 고민을 하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포스트잇에 짧게 글을 적고 나서 지유의 필통에 넣어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수업을 남겨둔 쉬는 시간이었다. 쪽지마저 씹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우울해하고 있을 때, 지유가 쪽지를 내게 건넸다.


'나 은재 좋아해.'


'나한테 서운한 거 있어?'라고 적은 내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이었다. 나는 살짝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아, 나랑 차은재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신경 쓰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유야, 차은재랑은 그냥 친구야.."

".. 그래, 은재는 아닌 것 같던데."


수업이 끝나는 대로 지유를 찾아가서 차은재와는 친구라고 말을 했지만 지유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로 가방을 챙겨서 민서와 교실을 나갔다.


'뭐야..'


지유와 민서의 태도에 혼란스럽다가도 지유가 남긴 말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차내기라도 하듯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저 멀리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차은재가 보였다.


"백이은!"

"..! 어.."

"...? 뭐야 ㅋㅋㅋ 왜 이렇게 어색해 해."

"응? 아니야.."


"저기.. 우리 오늘은 버스 타고 갈까?"

"어.. 그래~"


도무지 같이 걸어갈 수가 없었다. 빨리 집에 가서 이 어지러운 마음을 털어내고 싶었다. 차은재는 내게 괜찮냐고 물으면서 눈치를 살폈지만 나는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애써 모른 척 집에 가는 내내 창밖을 내다보았다.


푹 쉬라는 차은재의 말에 '너도.'라고 답하고서 집으로 들어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선 아까 버스에서 어떻게 메시지를 보낼까 내내 생각한 말을 지유에게 보냈다.


'아까 학교에서 한 말, 무슨 말이야?'


2시간이나 지났지만 답이 없었다.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메시지가 왔다.


'너 좋아한대. 은재는.'




'나를 좋아한다고? 차은재가..? 설마..

그리고 지유가 차은재를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몰랐을까. 지유가 혹시나 차은재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건가 싶었던 순간들이 오히려 좋아해서 그런 거였구나..'




우리는 또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틀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민서는 나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처럼 지유에게로 갔다. 자연스레 생각하고 있었던 결말이었다. 난 민서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차은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난 차은재와 등하교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차은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불편했고, 또 괜히 같이 얘기하는 모습을 애들이 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2주만 있으면 여름방학이었다. 한 학기 동안 너무나 많은 감정들에 힘들어했던 내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모습들과는 다르게 아픈 감정들은 내게 남았다.




난 방학의 대부분을 집에서만 지냈다. 엄마는 방학 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라고 했지만 아빠는 이럴 때 돌아다니면 큰일 난다며 집에 있으라고 말하면서 엄마와 투닥거렸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해서 답답하진 않았지만 꼭 무언가가 명치를 꾹 누르고 있는 것처럼 가끔 깊은 한숨이 나왔다.


"고등학교는 어디로 가고 싶어?"

"뭘 어디로 가~ 중학교 바로 옆에 있는 데로 가야지."

".. 생각해 볼게."


저녁밥을 먹는데 아빠가 내게 고등학교에 대해 물었다. 내가 사는 곳엔 고등학교가 두 곳 있었는데, 한 곳은 지금 다니고 있는 중학교 바로 옆에 있는 곳이었고, 또 한 곳은 버스를 두 번이나 타야 되는 1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엄마는 당연히 가까운 곳으로 가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듯 보였지만 나는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여름 방학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무렵, 공터에 가기 위해 문을 나섰다. 너무 덥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서 공터에 자주 가지 못했다.


공터에 간다는 소리를 듣고 조용히 방으로 향했던 아빠는 엄마 몰래 내 손에 만 원을 쥐어주셨다.


"이은아~ 가다가 아이스크림 사 먹어."

"응.. 고마워 아빠..!"


편의점을 공터에 가는 길에 들릴지 갔다 오는 길에 들릴지 고민하다가 가는 길에 들리기로 선택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얼른 에어컨 바람을 쐬야지 생각하면서 편의점 문을 여는 순간, 계산대에 서 있는 차은재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


내가 차은재를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을 때, 무슨 일 있는 거냐고 묻는 차은재의 메시지에 '아니야.'라고 짧게 답을 보냈다. 차은재는 이상함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얼마 안 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차은재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어색함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어정쩡하게 편의점 문을 잡은 채로 닫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내 피하듯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 것 같았다.

1+1이라고 적혀있는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산대 쪽을 쳐다보았지만 차은재는 이미 나가고 없는 것 같았다. 살짝의 안도감과 또 살짝의 아쉬움을 느끼면서 문을 열고 나왔는데, 차은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아이스크림 두 개나 먹어?"

"어..? 아니.."

"그럼 왜 두 개나 샀어?"

"아.."


"너.. 하나 먹을래?"

"좋아."


"어디 가는 중이었어?"

"응.."

"어디 가는 건지 물어봐도 돼?"

"아.. 저기 언덕 위에 공터에."

"나도 같이 가도 돼?"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기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묻는 차은재였다. 그러나 또 곧바로 움찔하더니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뭔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그래."

".. 어? ... 진짜?"

"응. 같이 가자."


사실 난 아주 조금 차은재를 탓했다. 그런데 계속 계속 갈수록 어쩐지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차은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매번 틀어지는 상황들에 심술 난 마음을 아무 죄 없는 차은재에게 풀고 만 것이었다.


공터에 도착해서 고양이를 묻어 준 자리 옆에 앉았다. 차은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옆에 앉았다.


"여기, 고양이 무덤이야. 내가 초등학생 때 우리 집에 찾아오던 길고양이였어."

"아.."


한참을 있다가, 또 내가 말을 이었다.


"미안해."


차은재를 쳐다보진 않았지만 그 아이의 놀란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네 탓이 아니라는 거 알았어. 그런데, 그냥.. 내가 바보 같아서 아무 상관도 없는 널 탓한 거야.. 미안해."


차은재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가만히 입을 뗐다.


"내가 너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나는 차은재를 쳐다봤다.


차은재는 천천히 덤덤하게 말을 했다.


"너 기억나? 그때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서 간식으로 햄버거를 나눠줬었거든? 그런데 한 애가 햄버거를 바닥에 떨어뜨린 거야. 다른 애들은 관심 없던가, 어떡하지 하고 마는 표정들이었는데, 너는 네 햄버거를 그 애한테 줬어. 배가 안 고프다면서."


차은재는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지우개를 잃어버린 짝꿍에게 네 지우개의 반쪽을 주는 아이였고, 숙제를 해오지 못한 친구한텐 네 숙제를 기꺼이 보여주는 아이였고, 다 같이 청소를 하는 상황에서 다들 하기 싫어서 대충 하는 와중에도 너는 다른 애들 구역까지 꼼꼼히 대신해 주는 그런.. 그런 좋은 아이였어. 그러니까 전혀 바보 같지 않아 넌."


".. 나를 더 생각해서 그런 거야. 잘 보이면 나에게 다가와 줄까 봐. 그냥.. 혼자 있기 싫어서 그런 거였어."


"이유가 뭐든. 그냥 넌.. 모르겠지만, 넌 망설이지 않고 네 걸 나눠줘. 넌 너보다 남을 더 생각해. 뭐, 내가 널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가끔 보이는 너의 모습들은 다 그랬어. 망설이지 않고 도와주고, 조용히 먼저 남을 생각하는 그런 아이였어. 네 표정에서 알 수 있어. 나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도 또 내가 내 아픈 이야기를 너한테 말했을 때도. 네가 반가워해줬잖아. 그리고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잖아. 넌 그냥 단지 들어준 것밖에 없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들어주는 게 엄청난 위로가 되어줬어 나에겐."


차은재의 말을 들으면서 누군가에겐 내 모습이 좋게 보인다는 것이 또 그렇게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서 나의 좋은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이, 이렇게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일이구나를 알았다. 차은재는 그 몇 안 되는 날들에서 내 짧은 순간들을 좋은 모습으로 간직해 주었다.


".. 고마워."


고맙다는 말에 차은재는 씩 웃어보였다.


우리는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람을 느꼈다.


"이제 갈까?"

"그래..!"


집으로 향하던 중, 차은재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어..? 고양이..!"

"여기 고양이들이 자주 오더라고."

"귀엽다 ㅎㅎ"


차은재는 본인 집 주변에서 누군가가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있는 것 같다면서 고양이들이 몇 마리 모여있는 곳에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가끔씩 같이 보러 오자고 했다.


"잘 가~"

"응. 아 저기 이은아, 우리 학교 같이 가자."

"그래..! 등교 날 봐."


여름방학이 끝나고 등교 첫날, 나는 차은재와 같이 학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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