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흐릿했다. 그리고 아주 희미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오랜 시간 셀 수도 없을 만큼 달칵거렸다. 아득한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매번 그래야만 했다. 까마득한 시간을 거닐며 간혹 맞춰지는 발걸음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했다. 그래야 하는 줄만 알았다.
찰나를 가져가버린 공기에 울리는 소리들에 일일이 맞으면서도 이 순간만 지나가면 되는 거겠지. 하며 쉽게 생각하고, 이 순간은 빨리 잊히겠지. 하고 쉽게 판단했다. 잠시만 맘속에서 숨 쉬는 것을 잠재우고, 잠깐만 참으면 오랫동안은 편안할 거라고 다독였다. 굳이 밀어내지 않아도 서서히 지워질 거라고 애써 담담한 척했다. 내게 보이는 것은 내가 걸러낼 수 있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언제라도 찾아보면 되는 거겠지. 그러니, 잠깐의 침묵 따위는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순간들은 녹지 않았다. 갈수록 단단히 얼어붙으며 묵묵히 제 나름대로의 누울 곳을 지었다. 이제는 제법 넓은 품 안에 숨 쉬고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이룬 삶이었다. 줄곧 잘 맞춰온 순간이라 생각했는데, 흐릿함도 점차 뚜렷해지고, 희미함도 꾸준히 선명해지고 있다고 보였었는데, 사실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얕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더더욱 힘껏 걸어야 했다. 두 다리에 힘을 실어, 두 팔을 휘두르며 저벅 저벅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언제라도 잠시, 쉬어가도 된다. 언제라도 잠깐, 두 주먹을 펴고 호흡해도 된다. 무리할 필요는 절대 없다.
더 이상은 미움으로 삶을 다듬어가지 않으려고 조금씩 돌리는 중이다. 미안함에 붙잡힌 마음이 미움으로 번져버린 걸 알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