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십일아 Jul 31. 2024

미소의 이야기 (8)

마음이 이상한 날.


도현이 옆에 서 있던 그 아이는 도현이가 좋아하는 아이일 것이다. 상일이가 말했던 그 아이 말이다. 환하게 웃던, 수줍은 듯 쳐다보던 도현이의 다정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어딘가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꽉 조여왔다.

돌린 고개를 다시 한번 돌리려다가 멈칫, 망설였다. 지민이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조용히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젠 표정조차 보이지 않는 거리였지만 왜인지 도현이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30분을 지각한 상일이를 오면 반 죽여놓겠다고 주먹을 꽉 쥐며 말하는 지민이었지만 헐레벌떡 뛰어오는 상일이를 보고는 마음이 살짝 약해졌는지 뒷짐을 지고서 늦은 이유를 물었다.


"아.. 하.. 악.. 잠시만.. 숨 좀 쉬고.. 후.."


"후... 하... 아 내가 진짜 딱 맞춰서 집에서 나왔거든? 아 근데, 너네 저기 편의점 앞 사거리 알지? 거기서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를 만났는데, 버스에서 잘못 내리셨는지 길을 잃으셨더라고.. 그래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오느라 늦었다.. 미안.. ㅎ"


"크흠.. 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네."

"오~.. 김상일 ~~"

"ㅋㅋㅋ 나 좀 멋지냐?"

"됐고. 저녁은 네가 사라."

'야! 그런 게 어딨냐! 네가 쏜다고 해서 온 건데..!"

"어허! 지각한 자가 말이 많다! 그리고 미소 밥 사준다고 한 거거든? 네가 아니라?"

"아- 야 그건 얘기했잖아~ 너도 인정해놓고! 그리고 우리 사이에 뭔 선을 긋냐~~"


상일이가 늦은 이유를 들은 지민이는 금세 화가 풀어졌다. 그러나 저녁밥은 상일이에게 쏘라고 했다. 그렇게 둘은 또 투닥투닥거리면서 식당으로 향했다. 도현이는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다. 일이 생겨서 못 올 것 같다는 말을 상일이에게 전해 들었다.


밥을 먹는 내내 나는 웃고 있었다. 웃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밥이 맛있었고, 지민이와 상일이와 하는 대화가 재밌었다. 그런데 어딘가 나의 영혼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만 같았다. 1시간 전에 도서관 앞으로. 도현이와 그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그때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한 편으로는 참 웃겼다. 내가 뭐라고, 아니 이 마음이 도대체 뭐라고 나를 이렇게 바닥으로 끌어내리는지. 이럴 정도는 아니라면서 냉정해졌다가, 도현이를 좋아하게 되었던 확실한 이유를 찾으려 헤매다가,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도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여럿의 감정이 나를 휘몰아칠 때, 내가 정말 도현이를 좋아하고 있구나를 다시 한번 깨달을 뿐이었다.


"아.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식당의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 여기저기 들려오는 잡음에 한 쪽 귀를 막고 통화를 이어가던 지민이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 상일이는 그런 지민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지민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했다. 무언가 나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는 상일이를 보다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야 ㅋㅋ 뭐야 얼릉 말해."

"눈치 한번 빠르네.. ㅋㅋ 아니, 저기 너 도서관에서 박도현 만났어?"

"..... 응. 뭐 만났다기보다는 나만 본 거지만."


".. 친구랑 같이 있는 것 같던데..?"

"...! 오유리도 봤구나."

"아~ 그 여자애가 오유리구나.."

"오늘 오유리 일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왜 도서관에 있었지.."

"..ㅋㅋ 뭐야 왜 네가 눈치 보냐?"

".. 너.. 박도현 좋아하잖아."


상일이가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진 않았다.


"역시.. 눈치가 빠르네.. ㅋㅋ"

".. 솔직히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거 알아. 네가 보기엔 별꼴이다 싶겠지. 이해해. 근데.. 나도 아는데.. 불안하더라. 견고함이라는 게, 보기보다 그렇게 단단하진 않더라고. 박도현, 나 그리고 오유리. 우리 셋도 뭐, 여전히 친구지만. 예전과는 다르거든. 다를 수밖에 없더라고.."


".. 너 지금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거 박도현이 싫어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 하지?"

"오..! ㅋㅋ 눈치 진짜..ㅋㅋ"

"네가 그런 애라서 말해주는 거야. 그리고.. 싫어하지 않을 거야. 박도현. 언제부턴가 오유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되려 설레하더라고. 오유리한테는 직접적으로 티를 못 내서 그런가.. 암튼 자기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털어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도현이가 나를 편하다고 생각할까?"

"그럼. 당연하지. 너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구나?"


다시 또 상일이의 단호한 답변이었다. 그런데 그 답변에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ㅋㅋㅋ 고맙다. 뭔가.. 위로가 되네."

"뭐 ㅋㅋ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누굴 좋아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설레는 일이잖아..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니었는데.. 그날 내가 너무 막무가내로 얘기한 건가 싶어서. 좀 신경이 쓰였다.. 미안했다.. 이 말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김상일 쭈그러드는 거 왜케 웃기지 ㅋㅋㅋ 이걸 지민이가 봐야 하는데. 아~ 아쉽네~"


"어?! 뭘? 뭘 내가 봐야 돼?"


그 순간 통화를 마친 지민이가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황한 우리는 얼버무리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아. 뭔 통화를 그렇게 길게 하냐? 후식 먹으러 안 갈 거임?"

"아~ 미안 미안. 우리 엄마 잔소리 진짜.. 끊어낼 수가 없다. 진쯔.. ㅋㅋ"

"ㅋㅋㅋ 그게 다 애정이지 뭐~"

"그려.. 애정으로 받아들여야지.. 내가 후식도 쏜다!! 가자!!"


집에 도착하니 셋이 찍은 사진을 지민이가 단톡방에 보냈다. '박도현 부럽지?'라는 말과 함께. 그 말에 상일이도 '박도현 부럽지??' 하며 약 올리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바로 읽은 도현이는 '응. 부럽다. 다음엔 꼭 나도 껴줘.'라고 답했다.


그 답을 한참을 보다가 '그래 ㅎㅎ' 라고 보냈다.

이전 07화 미소의 이야기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