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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파고 09화

3.2 조각

3장. 기억, 흐르는 조각들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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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언제든 기억이란 늘 하나의 줄기로 수렴할 리가 없다. 이는, 선처럼 이어진 서사가 아니라, 차라리 중간중간 끊어진 파편들, 조각난 장면의 잔재들일 양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기억을 더듬어 무언가 설명하고자 할 때조차, 결국 그 간격들을 그저 상상으로 메우고야 마는 일이 저토록 잦겠으므로.


이를테면 누군가 떠나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적, 처음엔 그가 있던 문틈의 햇살이, 다음으론 마지막에 들었던 말투가, 그러다 어느샌가 그와 함께 먹었던 음식의 온기가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결코 하나의 시간 선 위에 가지런히, 그러니까 저리도 균일하게 놓인 채 떠오를 수야 없으리라. 조각은 각자의 결로 입장하고, 스스로의 질감을 동반한 엇갈린 순서로 부유하며, 때론 정반대의 감정을 동반하기도 할 테니.


기억은 늘 그리도 흐트러져 있으며, 그 흐트러짐 속에서만 호흡한다. 우리가 떠올리는 과거는 언제나 당장의 감각, 당장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시 짜매지고 덧칠되어, 그처럼 다시 구성되곤 하겠으니. 그와 같이 때마다의 과거는 그저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현재로 스며드는 또 하나의 물감일 따름이다.


고로 저기 저 물감은, 그게 과연 어떤 질료건 간에, 완전하고 완결된 색감을 결코 가지고 있지 못할 터다. 가령, 어릴 적 마당에 앉아 있던 강아지의 눈을 떠올린다 치더라도, 어쩌면 그 눈의 색감을 그토록 정밀하고 정확히 묘사할 수는 결코 없을 양이므로.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눈은, 당장의 고독이나 온기를 자극하는 무엇으로서 우리 안으로부터 다시금 추억이라는 옷을 덧입고 왕왕 재차 출현하기도 하는바. 이 무수한 조각들은 ‘사실’로서 돌아오는 게 아니라, 감응으로서 매번 새로이 살아나는 셈이다.


따라서 기억이란, 되돌릴 수 없는 [필연적] 과거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현재로 등장하는 일종의 ‘지각된 잔상’이리라. 누구나 소위 ‘자아’에 한껏 매몰되어 예의 잔상 조각들을 부여잡고 자기 자신을 설명하거나 밝혀내고자 시도하는데 종종 혈안이 되기도 한다지만, 그땐 그 생각의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그 조각들이 벌써 그 자신을 설명하고 해명해 버린 이후일 수밖에 없겠으니. 과거의 파편이 작금의 판단을 이끌며 매 현재적 감정을 좌우하기로, 기억이 흐른다는 표현은 그 조각들이 지금 이 순간을 [본의 아니게] 그저 다시 구성하고 있다는 뜻에만 그치는 데 불과하리라. 오직 [본의 아니게] 현재를 구성하는, 현재가 생산한 해석만이 시점마다의 [필연적] 과거일 테고.


그리 종종 자신이 누구인지 묻던 어느 날, 우리는 여느 장면을 저리 무수히 떠올리기도 하는 양으로. 그게 완결된 정의가 아닌, 다만 파편의 현존에 불과할지언정. 그토록 온갖 조각들을 비추는 거울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과정 자체가 삶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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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