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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파고 08화

3.1 잠영

3장. 기억, 흐르는 조각들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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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기다릴 뿐이라, 그저 시일에 따라 가라앉아 있는데 불과할 텐데. 그리 언젠가 어느 날 그렇게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어느 때는 강물 아래로 느릿하게 가라앉는 돌처럼, 삶의 장면들 또한 서서히 아래로 침전하기도 하는바. 처음엔 선명히 떠오르던 찰나의 빛깔조차, 시간이 바래면 깊은 곳으로 은닉되어 살필 수 없게 되기도 하겠으므로. 허나, 완벽히 사라졌다 확신할 수 있을 방법은 도무지 없으리라. 기억이 그 유속과 향방을 바꿀 그 여느 날, 언제 감추어지기라도 했었냐는 듯, 그리 천연덕스레 때론 또 얼마간 다소 낯선 모습을 하고 다시 돌아와, 그것이 우리 앞에 서서 앞의 문을 재차 두드리기도 하는 것이다.


물을 통과한 햇살이 굴절되듯, 침전한 기억은 현재를 그토록 자주 비튼다. 예컨대, 어떤 결정 앞에서 ‘문득’ 망설일 적에도, 실은 은밀히 떠오른 과거의 여느 조각이 우리를 잡아끌 적이 무던히도 있지 않겠는지. 비록 우리는 그토록 자주,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당장의 감정이나 상황을 탓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그처럼 기억은 배후에 서서 은밀히 우리 스스로를 이끌기도 하는바. 어린 시절 혹자의 시선, 떠나간 목소리, 소리 없이 닫힌 문짝 하나, 그 모든 장면들은 잊혀졌다 여겼을지도 모르겠으나, 어느 틈엔가 자신으로 하여금 자세를 바꾸게 하고, 눈을 흐리게 뜨게 하며, 목소리 끝을 망설이게 하기도 한다.


그처럼 ‘당장’이란, 끝도 없이 잠영하는 기억들과 아울러 헤엄치는 일일 모양이다. 당장 딛고 서 있는 이 얼어붙은 강물 아래엔, 무수한 기억의 층위들이 각자의 유속과 향방을 품은 채 각각 독자적으로 헤엄치고 있을 양이다. 잊혔다 믿은 장면이 끝끝내 대세를 휘게 하고, 단단한 선택처럼 보였던 결정조차 실은 오랜 잠영의 누적 끝에 ‘문득’ 떠오른 무엇일 수 있겠으니.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아득한 과거가 아니라, 각 조각 그 자체가 이미 당장을 구성하는 중인 현재적 밀도 자체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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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