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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파고 17화

6.1 접촉

6장. 타자와의 접점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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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당연히’ 어떤 방식으로든 홀로 있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오늘날 그 누가 ‘자급자족’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가 그 어떤 ‘타인’의 영향 한 톨 없이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문자는 이미 타인으로 구성된 문명의 때마다의 가장 최후 집약이며, 모든 작물은 언젠가 역사 속 어느 시점에 혹자가 교배한 이종의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유속은 그 탄생부터 모조리 타인이라는 이물감 바깥에서 별도로 성립할 수 없는 무엇 아니겠나.


설령 제아무리 고독을 자인하며 자족을 꿈꾼다 하더라도, 타인의 흔적은 그토록 먼저 우리 안에 들어와 이미 우리 자신의 뿌리 끝까지 하나하나 스며 있어 우리의 몸짓과 시선, 언어, 또 온갖 경험의 최후 한 톨까지도 타인의 그림자가 그토록 깊이 각인되어 있겠으므로. 삶이란 언제나 무수한 타인과의 더 무수한 접촉 위에서만 성립하는 운동 그 자체인 것이다.


그처럼 타인과의 접촉은 자의적으로 정의한 물리적 만남이나 관계적 교류에 국한되지 않는바. 우리는 눈짓 하나, 말 한 조각, 심지어 낯선 공간에 남겨진 여운과조차도 반드시 접촉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 접촉은 의식적 통제 바깥에 있는 어떤 떨림을 낳기도 하고, 기존 감각을 교란하기도 하며 우리 내부 흐름을 미묘하게 틀어놓는다.


이를테면 낯선 이가 스친 눈짓 하나에도 우리는 불현듯 불쾌감을 떠올릴 수도 있으리라. 혹 전혀 말을 섞은 적 없던 혹자의 무심한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의식 어딘가를 돌이켜 그토록 긴 시간 거듭 확인하게 하기도 하겠다. 이처럼 접촉은 언제나 감각 운동인 동시에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섞어 허물어 버리는 기묘한 시발점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나’로 명명되는 저 흔하고 평범한 소위 ‘자아’조차 그 자체로 타인과 마주했던 저 무수한 접촉 현상에의 임의 누적된 집합 정도일 뿐 아니겠나. 애초부터 타인(부모)으로부터 양육되어, 타인이 남긴 언어로 생각하고, 타인이 만들어낸 규범 속에 몸을 가누며,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진 거울상을 경유해 스스로 인식하는바. 이를테면, <타인이 만들어낸, 스스로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을 맹목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예의 획일적 욕망이, 타인으로부터 얼마나 일방적으로 주입된 채, 또 얼마나 마치 그게 아닌 척, 자기만의 특별함이라는 획일적 강박을 특별하지 않게, 그토록 평범하게 펼치며 살아가곤 하는지>. 결국 이런 등등의 ‘자아’는, 무수한 접촉들이 서로 겹치고 흩어지며 만들어낸 점차 흐려지는 저 흔적의 임의 조각 모음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돌이켜 질문할 수도 있으리라. 과연 어디까지가 ‘나’인가? 하고. 또, 과연 어디서부터가 ‘타인’인가? 하고. 그리 영영 답을 알 수 없을 질문을 하염없이 던지며 저 흔한 ‘자의식’ 속에서 시간을 낚으며 ‘심각하고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저기 저 ‘자의식’에 적극적으로 매몰된 채로도 더욱 매몰될 방법에 몰두하는 예의 존재론(정체성/구강기)적 질문을 제아무리 ‘심각하고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시도한다고 해서, 그게 곧장 그리 ‘심각하고 어른스러운’ 문제로 탈바꿈되진 않는바.


우리의 <근본적인 시원적 처음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접촉은, 이미 그 경계를 뒤섞으며, ‘나’라는 존재를 단순히 ‘내 안에만’ 가두어둘 수 있으리라는 자족적 망상이 그저 망상 따위에 불과하다는 걸 ‘논증’해 왔기에.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일부로, 또 타인은 언제나 우리의 일부로 아주 앞서부터, 그러니까 <늘 상상할 수 있는 최초보다 훨씬 이전>부터 벌써 뒤섞여 흐르는 중이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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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