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통증, 비틀린 궤적
_
물론 흉터나 상흔 또한 그저 표면에 남는 이미지 따위로만 기능하진 않을 텐데. 이는 우리 뿌리까지 스며들어 새겨진 무엇이 되기도 하는바. 어떤 상흔을 포함한 무수한 흔적들은 종종 당사자에게 그 효과를 가시적으로 남겨 지나칠 뿐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의문과 또 다른 효과들을 저 사후에 무수히 던져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슨 분위기, 무슨 말투, 무슨 선택들에 우리 자신조차 모르게라도 그토록 자주 작용할 적이 적지 않았으리라.
가령 한 사람이 특정한 길을 피하거나, 특정한 관계 앞에서 주춤하거나, 어떤 말에는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할 양인데. “왜 나는 이럴까?”라는 자문에조차의 배후에는 이미 오래전 새겨진 흔적이 은밀하고 내밀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던가. 저 모든 흔적은 다만 과거를 증명하는 따위가 아니라, 현재의 운동을 구성하는 힘으로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발걸음을 비트는 현재적 무언가일 테니.
흔적은 언젠가 유속의 장애물이었던 동시에, 유속 그 자체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을 텐데. 이는, 강물이 굽이친 자리에 모래가 쌓이듯, 지나온 운동이 남긴 궤적이 그 자신의 길과 울타리로 남는 셈이겠으므로. 흔적으로서의 궤적은 오늘날 새로운 유속의 탄생에 기어이 그 영향력을 반드시 미치고야 마는 것이다.
예컨대, 유년기 심적 충격과 충동 따위들은 단순히 지난 사건으로만 남겨지지는 않으며, 차후 선택과 시선의 구조, 말과 침묵의 방식 등 온갖 향방으로 영향을 끼쳐서는 마침내 자의(자칭 본위)적 유속을 그토록 미묘하게 꺾어 새로운 <유효한> 유속을 만들어 놓고야 마는 것이다. 그 무수한 전환점들 위에서 우리는 이전과 다른 무수한 ‘변곡’의 운동들을 거듭하는 셈이라.
결국 어떤 흔적은 우리에게 영영 다시 탄생할 답변의 항구적인 산파로, 그러니까 영원히 매듭지어질 수 없는 의문으로써 끊임없이 갱신되는 답의 생산자로 남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이 방향으로 가고 있나? 나의 이 결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런 의문들은, 설령 그것들이 저토록 흔한 [나(자아)]에 매몰되었을지언정, 어찌나 자주 완결된 답을 거부하곤 우리를 매번 다시 습격하던지. 이는, 그저 우리 삶이 그토록 무수한 흔적들의 층위를 전제로 영영 반복적으로 다시 구성되고 있는 그 자체 운동임을, 그리고 다만 그 안에서 (모든 [자아]가 모조리) 매번 새로이 태어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나.
그처럼 삶은, 끝끝내 그리고 늘 항구적인 흔적을 스스로에게 남기는데 아울러 예의 흔적으로 구성된 운동 자체로써, 그런 의미에서 거듭 다시 태어나고 또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그런 <운동>의 <지속> 자체일 모양이니.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