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통증, 비틀린 궤적
_
삶이라는 유속에서 그 무엇도 정지에 비롯될 수야 없을 텐데. 이를테면 죽음은 이미 그 유속 바깥에 있으며, 예의 죽음을 미리부터 연습하는 양 보이는 ‘통증’이라는 생사의 간격 또한 유속의 정지를 조금도 상징할 순 없으리라.
차라리 그것은 일종의 교정 운동을 창발하는 기존 운동의 결과로서의 틀어짐 아니겠는지. 따라서 불균형은, 그 자체로 새로운 균형을 전제한 듯 보이는 운동의 시발점이라는 점에서, 제 나름의 유속을, 심지어 어느 정도는 새로운 유속을 품고 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이토록 세계가 영원히 계속해서 변화할지언정 영영 지속되리라는 전제 위에서 균열의 함의는, 그리도 자주 기존 질서의 붕괴가 아닌 새로운 질서의 탄생인 것이다. 시간의 노선을 따라 이어진 현재적 레일 위에서 그것은 매번 기성 질서에 대해서는 균열로 간주되기도 하겠으나, 차후 새겨진 역사 위에서는 종종 변곡점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하지 않겠나.
이를테면, 어느 개체의 생이 계속된다는 보장 아래 그의 살갗이 찢길 때 그것은 단지 살의 손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신경과 의식, 기억에까지 무언가 ‘경험적인’ 균열을 새기고, 이제 유기체의 역사는 그것을 품고 차후 시간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스쳐 간 많은 것들, 이를테면 이별의 순간, 배신의 감각—그 모든 건 ‘지나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을 경계로 의식에 금을 그어 구분해 둘 뿐일 테니. 그 금은 당장은 작은 틈처럼 보일지라도, 점점 벌어지고 퍼져선 마침내 뿌리 구조의 균형까지도 바꾸어 놓을 수 있지 않겠는지. 그런 의미에서 어떤 통증은 단순히 감각에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이 흐르는 유속의 궤적을 비트는 특정한 운동이 되기도 할 터다.
저기 저 무수한 통증들은 덧없이 지나가더라도 강렬한 감각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처럼 균열이 된 통증은 그저 짧은 흉터로, 다만 색인으로만 끝날 순 없으리라. 그리 그어진 금들은 검열의 정지점이 되어, 차후의 유속을 재구성하는 무늬로도 남는바. 혹자가 스스로 ‘예전의 나’에 대한 이물감을 느낄 적, 거기엔 그토록 자주 지나간 균열의 작용이 감추어져 있는 셈이다. 우리는 상처로 인해 변모하고, 흉터 속에서 가상의 미래를 피하여 재차 흐르기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 것이다.
어쩌면, 때론 붕괴 속에서만 새로운 결을 맞이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처럼 균열은 붕괴시키기도 하지만, 아울러 다른 방식의 재구성을 위한 도약의 가능성도 간직하고 있는 모양이겠으므로. 만일 저토록 무수한 통증 중에서도, 그러니까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도무지 피할 수 없던 그런 통증이라면, 거기 통증에는 과연 어떤 위상을 부여해야 할는지. 곧, 그 자체로 변치 않는 통증으로조차 새로운 궤적을 작성할 문턱에 비로소 다다를 수 있기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