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감정, 표류하는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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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른바, 특정 정체성을 가진 ‘주체’가 정신의 상태(가령 여느 감정들)를 ‘경험한다’는 식의 오해가 불거진다. 말하자면, 외부의 자극에 비롯되었을지언정, 어쨌거나 몰아치는 정신의 파고는 ‘주체’가 ‘경험할 대상’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주체’를 ‘재구성’하는 경험이겠으나, 다만 예의 경험할 대상으로 오해되곤 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나치며 휘발되려던 냄새, 스치는 소리, 오래전 들었던 노랫말 한 자락 — 그 모든 것은 특정한 감응을 소환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정신적 동요들이 그 자체로 기존의 자아 구조를 재구성한다는 점이다(요컨대 그것을 겪는 (혹은 떠올린) 시점에 거기 서 있는 특정 자아는 이미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자아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의 감응은 주체의 “안정된 정체성”에 부가되는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체성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수정하는 운동이다(신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개인적 경험에서도 흔히 관찰될 텐데. 아득한 과거의 감각은 오늘의 동요를 호출하고, 그리 감응된 동요는 작금의 판단을 변모시키며, 마침내 새로운 행동이나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설령, 개인이 제아무리 자신을 하나의 일관된 존재로 여기는 (자기애적) ‘증상(존재론)’에 처해있을지라도, 기실 그는 정신의 연속적인 파동들에 엇물려 매번 다시 구성되는 중이다. 그리고 물론, 이 파동들은 특정한 방향성을 일관된 방식으로 가질 수 없다. 가령, 여느 날은 사소한 일로 크게 동요하고, 또 여느 날은 중대한 사건에도 외면하여 무감각할 수 있는 양.
따라서 동요는 그저 파괴로만 읽힐 수 없는바. 그것은 운동의 증거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는 곧, 당사자를 포함한 저 모든 피조물이 정지한 상태가 결코 아니라 영원히 변화하는 유속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반증일 텐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매 정신의 동요를 통해 주체는, 파멸의 올무에 더해 자기 자신을 재구성할 기회 또한 얻는 셈이다. 이를테면 기존의 관점이나 패턴이 깨질 때, 바로 저 위기에 비롯해서 당사자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겠으므로. 고로, 시시각각 ‘주체’는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정신적 감응은 ‘느낌’이라는 단어로, 마치 우리에게 덧붙은 부수물이라는 양 오해될 수 있겠으나, 실은 우리 자신을 재구성하며 그리 느낌 스스로도 다시 재구성된 채, 다시 이를 전제로 우리 자신을 또 재구성하는, 무엇보다 격렬한 ‘운동’의 장인 셈이다. 이른바, 동요는 혼란이 아니라 생성 아니겠는지. 파동 없이는 유속이 없고, 유속 없이는 변화가 없겠으며, 비로소 이 변화의 과정 자체가 ‘삶’이겠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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