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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파고 11화

4.1 파동

4장. 감정, 표류하는 파동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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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출발하는 장소는 대체 어디인가. 누구나의 내면에는 이미 매 감정들의 씨앗이 잠재된 채 태어나는 것인지, 혹 그게 아니라면 차후 밖으로부터 주입되는 것인지.

문득 마주친 풍경 — 지나가는 고양이의 얇은 울음소리나 빗소리, 혹 오래전 좋아하던 노래가 들릴 적 — 덕택에 이유도 모른 채 두근댈 적이 있지 않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순간에도 작은 자극 하나가 파문처럼 속으로 번지곤 하지 않나. 마치 표면tension을 깨뜨리는 물방울 하나처럼. 이는 간혹 조용하던 정신에 아주 작은 파문을 일으켜, 그것이 한 줄기 물결로 번지고, 또 흘러가, 이내 전체의 유속을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저 우연한 파동들은, 그 전개 과정조차 예견될 수 없겠으므로. 처음엔 다소 사소한 무엇이었더라도, 그는 정신 구조를 가로지르며 삽시간에 커다란 파문이 되어 밀어닥치기도 한다. 그리 말투를 수정하고, 걸음걸이를 바꾸며, 심지어 본 적 없는 리듬으로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도 하는 양으로.

가령, 밤길을 걷다 불쑥 울컥할 수도 있으리라. 스스로에게조차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래전 사라진 얼굴들과 미처 마주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한참 늦은 밤에야 정신을 휘저으며 밀려올 수도 있는 셈이다. 그처럼 정신 역동은, 형식에 맞춰 호출될 수 없으며, 그게 누구든 당사자조차 예견할 수 없는 무엇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정신이란 애초부터가 단단한 구조물이 아닌 게 아닌지. 가령, 겉으론 안정적으로 보이곤 하더라도, 그건 그 아래 늘 미세한 출렁임이 도리어 표면의 양상을 겨우 위태롭게 떠받치고 있는 결과일 수 있는 셈이므로.

이를테면 누군가의 한마디, 스쳐 가는 눈짓, 어젯밤 떨어진 비 냄새조차, 그 미세한 운동을 자극할 수 있겠으니. 따라서 감정은 ‘느낌’이 아니라, ‘이행’하는 ‘운동’ 그 자체일 텐데. 한 줄기 소박한 빛이 어두운 방 안을 밝히듯, 줄기마다의 감정은 단숨에 정신을, 저기 저 감정과 이어진 무수한 정신의 가닥들을 수도 없이 물결치게 할 수 있으리라.

다시, 여기서 언제나의 문제는, 누구도 그 파동의 방향과 세기를 미리 알 수 없으며 계획할 수 없고, 따라서 결코 ‘통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작은 일에도 웃음이 솟는 날이 있는가 하면,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차오르는 날도 있다. 힘겹게 눌러왔던 감정이 순간 뒤늦게 밀려와, 뜻밖의 순간에 혹자를 무너뜨리기도 하는바. 저 모든 정신적 파동은 때때로 자아의 한계선을 흔들며, 자기 존재의 운동성을 ‘자기도 몰래’ 새롭게 짜곤 하는 것이다.

예의 저 파동이 때론 우릴 살리고 때론 부수겠으므로. 그것은 때론 혁명이고 때론 몰락이리라. 고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감정 이후 그 파동이 ‘이행’하는 ‘운동’ 정도일 수밖에 없을 터다.

그토록 요란한 정신의 파고 위에서 인간은 — 설령 얼마간은 짐짓 연출되어 잠시 잠깐이라도 그리 보이더라도 — 누구나 고요히 머물 수 없으며, 언제나 아울러 흔들리고, 진동하며, 마침내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것이다. 삶이란 이 끝없이 파도치는 운명에 모든 걸 맡기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나름대로 운동의 방향을 찾아 다시 구성하고자 하는 유속 자체일는지 모른다. 누구도, 그 어느 단 한 순간도 완전한 정지 상태로 멈춰 있는 게 가능할 적은 결코 없을 테니. 그저 이 혼란의 파고가 서로의 휴전 협상으로 찰나간 잦아드는 과정(이행/운동) 중에 있거나, 몰아치는 폭풍 소리가 마치 속삭이듯 들리는 양 스스로 외면했을 뿐이겠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정신이나 신체라 불리우는 이 운동 자체, 그러니까 저기 저 무수한 파고들은 마침내 우리가 살아 있다는 몇 안 되는 증거 아니겠는지. 고요해 보이는 강물 아래 강한 물살도 나름대로의 질서를 이루어 가듯, 무심한(혹은 자랑스럽게 [어른스러운]) 표정 아래서도 언제나 미세한 파동이 각자의 혼란을 다음 무늬로 품고 있을 모양이니. 그 파장이 오늘도, 우리를 다음 미지의 질서로 기어이 밀어 올리고 있을지 누가 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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