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파편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온 May 11. 2024

33 맥락 운동성

시즌 4 HOW

가령 "다르다"는 서술어와 "틀리다"는 서술어는 동등하지 않다. 위 서술어로 비추어 봤을 때,  "1 + 1 = 2"와 "1 + 1 = 3"라는 명제들에서 하나는 나머지 하나와 '다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는 '틀리지 않았고' 나머지 하나는 '틀렸다'. 한편, "1 + 1 = 2"와 "2 + 2 = 4"라는 명제들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틀리지 않았다'.

이를테면, 다르다는 걸 찾아낼 때의 검증 방식은 틀리다는 걸 찾아내는 검증 방식과 '다르다'.

소위 '학자'로 치자면 다르다고 주장되는 무수한 다양성들 틈에서 '틀린' 것을 솎아 내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가지는 '학자'가 있고, 그게 틀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저 '다른' 무수히 많은 사례를 수집하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가지는 '학자'가 있으리라. 전자는 '논증'에 비롯하고, 후자는 '수집'에 비롯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발견되는 건, 수집이 논증에 앞서는 기이한 사태다. 말하자면, '필연성'이 '사례'로 탈락하는 '의도적'이고도 '기이한' 문법이 얼마나 자주 발견되는지.

명석 판명한 논증의 패턴을, 그렇지 않은 패턴과 동일 선상에 두는 '수집'의 과정에서 논증을 하나의 의견으로 치부하고자 애를 쓰는 혹자의 노력은, 마치 어느 철학자가 평생을 두고 무슨 개념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어림하여 서술하는 '권위'를 '굳이' 생애 최고의 화두로 삼는 노력과 다름 없지 않나. 그처럼 '논증'을 하나의 '수집' 사례로 끌어내린 후, 그렇게 마치 동등한 양의 동일 선상의 사례(의견) 중에서도 원하는 한 가지를 '논증'이 아니라 '감상'에 호소하는 마케팅의 논법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욕동들이 있다.

그와 같은 마케팅 과정은 어느 정도 도덕의 색채를 띤다. "1 + 1 = 2"가 존중받아야 하는 만큼 "1 + 1 = 3"도 존중받아야 한다. 둘은 서로 다른 '사례'이나, 우리는 팍팍한 "1 + 1 = 2"보다 낭만적인 "1 + 1 = 3"을 믿고 싶다는 식이다. 여기서 어떤 학자의 논증과 카피라이터의 호소는 분명 '다르지만', 개중에서 유효성으로 치자면 '호소력 짙은' 카피라이터의 '치명적인 음색'의 서술어가 더욱 유효할는지 모르겠다.

이 '유효성'은 어떤 독자에게는 유효하지 않은 명제조차 마치 유효한 양 주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리 학자의 '이미지'를 덧입고 '논증'을 피해 가며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우스운 시도를 할 때, 위와 같은 '카피라이터'의 '유사 논증 행위'는 그 어느 때보다 (가령 다른 학자들의 ‘성격’을 어림하여 ‘내용’을 퉁 치거나, 어림한 의도와 파편적인 내용 인용으로 그 ‘적용 범위’를 자의적으로 어림하여 한정하며 퉁 치는 식으로) ‘자의적으로만’ 유효할 모양이다.

과연 저와 같이 역사가 전개된다면, 언젠가 기본적인 필연성조차 모두 민중의 투표(상상)로 결정될지도 모르겠다. 어느 연설에 의거한 행위는, 이미 증명이나 논의보다는 호불호와 그 거리가 가깝다. 가령 기름에 불이 붙는지 안 붙는지에 대한 ‘판단’이 민중의 투표에 의해 전개되는 식이지만, 기실 여기서 투표를 추동한 연설가는 소위 ‘엄밀한 논증’을 대리하기 위한 호소로 그 수사들을 ‘어른스럽고’ ‘자랑스러우며’ ‘진중하게’ 연출하고자 그 노력을 힘껏 집중하지 않겠나. 그들은 개인의 합에 불과한 군중에게 소속감을 부여하면서 도약에 시동을 걸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의적 관중에게 (최소한) 사상적 집단의 자리를 제안하며 동시에 그들의 대표를 스스로 자청하는 식이다(비로소 이 대표들이 각각 누구 편인지, 그리하여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가 그 내용의 당위성보다 중요해지는 것이다).

집단을 인격으로 가정하는 행정적인 대표성은 저리도 쉬이 만나는 허상이다. 집단(공동체)은 개인의 합이지, 하나의 인격이 될 수 없을 양이니. 그럼에도 분리불안에 내몰린 우리는 종종 어떤 공동체를 하나의 인격으로 가정하곤 한다. 그럴 적에 우리는 개인과 친해지듯 집단을 점유하고자 하나, 집단에 속한 개인들은 집단 자체가 아닌 별개의 인격을 각자 소유하고 있을 뿐이겠으므로 끊임없이 헛물을 켤 모양이다.

이 가상의 공동체는 끝도 없이 많다. '가족', '친구', '민족', '회사', '사회', 나아가 ‘뭔가를 좀 아는 동료(사상의 동일시)’, ‘세상을 좀 이해한 사람(자칭 어른스러운 현자들 사이의 동일시)’ 등. 그리하여 혹자가 이러한 가상의 공동체를 대표하여 연설한다면 의심해 볼 법도 하다. 가령 '사회는 이렇다'거나, 이것의 '국민의 뜻(의지)'이라거나, 진정한 가족(친구)은 이래야 한다거나처럼 우선 소위 ‘본질(진리)’을 주장하고 보는 양태에 대하여. 그들은 집단의 인격이라는 허상과 마주하는 데는 헛물을 켤지언정, 집단의 이름 뒤에 숨고 싶은 개인들로부터 유효한 행동을 끌어내는 데는 특히 얼마간의 성취를 얻곤 하지 않던가.

거기서 급조된 ‘본질’은 어떤 종류의 소속감을 기획하(여 투사하)기도 한다. 명제에 동의하는 자들, 혹은 그로부터 책임을 벗을 명분을 얻는 자들, 뭐가 되었든 일단 믿어 열광하고 싶은 자들 등등. 그리하여, 여기서의 ‘본질’은 이미 분리불안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여느 누구의 ‘의미’와 같이, 스스로 자족적이라 주장하는 그 무슨 ‘본질’조차 맥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중이다. 끊임없이 뒤바뀌는 맥락 위에서 정적인 함의를 정의하는 양 굴다가도, 금세 저들 자신이 역동적인 맥락의 운동성에 그 의미를 얼마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는지를 위기의 때마다 스스로 증명하곤 한다(“내 말은 그 뜻이 아니고.”).

그럼에도, 가령 아주 머나먼 거리를 오랜 시간 걸려 주파해서라도,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다. 형용사로 덕지덕지 점철된 문장에서 근거와 주장을 잇는 ‘서술어’의 (빈) 자리를 찾아내는 혹자의 낭독에서처럼. 조금만 떨어져 바라보더라도, 거기서 굳이 배설되는 자랑스러움과 의도적으로 분비되는 어른스러움 뒤에 이전 문장의 주장이 분해되어 다음 문장의 근거로 기능했어야 하는 관절이 나머지 요소들로부터 그토록 손쉽게 구별되어 발각되곤 하지 않던가.

이는 맥락을 추론하는 게 그 포석들 사이에 있는 ‘필연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까닭일 텐데. 요컨대 여기 이 필연성은 덮어놓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등의 기준 없는 어림이 아니라, 이미 출발한 단위 맥락으로부터 곧장 이어지는 다음 맥락의 필수 전제가 되는 역동 요소가 과연 무엇인가에 따라 역으로 매번 달리 소급 추리되곤 하는 매 유속인 셈이니. 말하자면 분명 다양한 맥락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각각의 맥락은, 자체 맥락에 대하여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을 필연성으로부터 연속해서 솎아내며, 그리 걸러지는 기준이 되는 전개 자체를 다시 찾아내는 과정으로서, 그처럼 동일성에서 동등성을 거쳐 이어지는 필연성들의 ‘차이’로 필연성들 자체와 그들 필연성들 간의 ‘관계’에서 다음을 연역하는 역동 과정에 다름 아니다. 비로소 우리가 늘상 추리하는 ‘맥락’은 이미 운동성 자체이며, 추리 자체 또한 벌써 운동성일 양이므로.

매거진의 이전글 32 허구의 과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