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가는 길이 나빴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형 마트와는 또 다른 재미와 설렘이 있습니다. 뚜벅이인 제가 제 집에서 나서서 얼마간 버스 타고 가 지하철로 다시 옮겨 타고 20분쯤 가면 저희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래시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크게 몇 구역으로 나뉘어 주 판매 품목이 달라지는데 시간 여유 없고 사야 될 분명한 상품이 있으면 그곳만 빠르게 훑고 다시 돌아오고 이번처럼 시간 여유도 많고 아이 옷 교환하고 나면 크게 사고자 하는 게 없을 때 저는 크게 크게 시장을 몇 바퀴 돕니다.
애들 유치원 다닐 때 남편이 하는 일이 좀 휘청일 때 저도 무언가 해보고 싶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어야 할 그때 전 엉뚱하게 시장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장은 사람 구경 좋아하고 관찰하길 좋아하는 제가 실례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봐야만 하는 공간이라서요. 글로 쓰고 보니 참 예의 없어 보이는데 사실 저는 아직도 사람 눈을 잘 못 볼만큼 내향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입니다. 오래 일을 쉬고 집에서 애들 키우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한 게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고립된 생활을 해 와서 그런 성향은 더 심해졌죠. 그래서 오히려 사람이 너무 많은 공간을 가면 어쩔 수 없이 눈 마주칠 일이 많이 생기고 부닥치고 본의 아니게 어르신들과의 스킨십(할머님이나 어머님들은 뒤에 계시면 많이 기다려주시지 않고 등, 허리, 심지어 엉덩이도 밀어버리세요)도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그게 막 불쾌하지 않는 공간이랄까요? 서로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한 곳에 모여 복작 이 다니 묘한 소속감도 생기고 뭔가 살아있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힘들 때 시장엘 가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한 그릇 3천 원 하는 잔치국수 먹으러 가 혼자 자리를 잡으니 젊은 새댁(!)이 알뜰하니 이런 곳에 밥 먹으러 왔다고 먹을 수 있겠어? 하시더니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한 그릇 뚝딱하면 이쁘다고 반이상을 더 주셔서 허리띠 풀러 가며 다 먹고 나와 허리도 못 펴고 집으로 오기도 하고, 몇 번 가서 인사드렸다고 갑자기 덤도 주시고요. 오며 가며 한 번씩 들러 앉아 쉬어가던 커피집 사장님은 절보고 요즘은 아들내미가 말 좀 잘 듣냐 하시는데 저 딸만 둘이거든요. 그래도 네, 요즘은 그래도 철 좀 들었다고 먼저 와서 어깨도 주 물어주네요~ 하니 그래, 그 집 아들 그래도 공부는 좀 하잖아, 저번에는 전교 회장인가 됐다고 했지? 하며 모르는 분들의 이야기가 짬뽕돼서 나와도 그마저도 재밌습니다. 저는 스몰톡도 먼저 건넬 줄 아는 애살 있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식사도 합석해서 같이 하고 이건 어디 가면 사죠, 여긴 어디로 가야 하죠 하며 먼저 말도 걸 줄 아는 사람이 조금씩 되더라고요. 뭐 거창한 건 아니지만 사회성도 많이 부족해지고 덜 자란 상태에서 애만 둘 불쑥 낳아 키우던 사람이 자연스레 나이 먹고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 조금 배웠다고 해야 할지..
그 많은 상점들 오고 가며 그야말로 한 분야에서 3~40년간 종사하신 전문가님들의 생생한 요즘 경기 이야기, 요즘 소비자들 이야기, 요즘 장사의 흐름을 들으며 정말 절망스러웠던 그때에 조금은 갈피를 잡아나갔던 거 같습니다. 아니 사실은 왠지 나에게만 호락호락하지 않고 쉽지 않던 세상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훨씬 삶에 대해 박학하신 분들이 날 품어주고 내가 틀려서가 아니라 아직 나에게 때가 안 왔을 뿐이라고 하시는 거 같아 마음이 편해집니다.
생각이 복잡할 때 나는 시장엘 갑니다. 나를 잘 모르는 낯선 얼굴들과 마주합니다. 해답은 그곳에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또 쉽게 풀려갈 것입니다. 시장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