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은 이제 남편이 무섭다.
‘원래 저렇게 미쳐 날뛰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때 그 일만 없었더라면….’
원래 이 작은 회사는 사장, 사장의 동생인 이사, 사장의 부인인 이사 겸 실장, 지숙 이렇게 넷이서 일하는 곳이었다. 지숙은 실장보다 10살이나 어렸지만, 자재관리에 회계까지 꼼꼼하게 일도 잘하고, 특히 매출 관리에 탁월함을 보였다. 입사 후 4년 동안 지독한 고생을 함께 버텨내며 회사를 키워왔고, 5년째부터 국가보조금을 받으며 정상 궤도에 올라서기까지 지숙의 숨은 공이 컸다. 7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일해 주었다. 사장은 가족도 아닌데, 함께 물심양면 노력해 준 지숙에게 감사하며 매출이 좋을 때는 보너스도 두둑이 챙겨주고, 5년차에는 부장 직함과 함께 연봉도 꽤 많이 올려주었다. 실장과도 친자매처럼 돈독하게 지내고 여름휴가도 함께할 정도로 그들은 가족 같았다.
그런 지숙이 어느 날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실장은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털이 거꾸로 솟는다. 매출 관리를 해오던 지숙이 언제부터인가 돈을 빼돌리고 있었고, 그 금액이 10억이 넘어갈 때 즈음 회사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장은 바로 지숙을 고소했지만, 지숙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수취인 부재로 장기화 되고 있다. 그날 이후로 사장은 사무실 안팎 곳곳에 CCTV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항상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외근을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와 CCTV를 돌려보는 것이 되었다. 사장은 사람을, 특히 여직원을 못믿게 되었고, 짜증과 욕설도 갈수록 늘어났다. 그리고 실장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겼다.
“네가 지숙이 그 년을 너무 믿어서 이 사달이 났지. 누가 회사 보안카드까지 다 맡기래? 넌 그동안 뭐한 거야? 그년이 다 해쳐 먹을 동안 뭐한 거냐고? 이제부터 은행 업무는 무조건 네가 해! 인터넷 뱅킹도 안돼! 한 건이든 열 건이든 무조건 직접 은행가서 처리하고 와!”
사장은 실장에게 이렇게 특명을 내렸다. 실장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매일 은행을 간다. 하루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필요하면 계속 간다. 속상한 마음에 지숙을 믿었던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지만, 남편이 자신을 벌레 취급하며 낮잡아보는 것은 싫다. 매일 아침 직원들 앞에서 쌍욕을 할 때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실장은 직원들이 퇴근을 하고 나면,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바로 청소! 여름이면 특히 곤욕이다. 시부모님이 살던 집을 개조한 사무실이라 화장실은 물론 천정과 벽 곳곳에 곰팡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 락스로 아무리 닦아도 이틀이 멀다하고 곰팡이들은 스물스물 기어올라온다. 사무실 곳곳을 쓸고 닦아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고, 손바닥이 모두 벗겨지고 피도 나지만, 검은 곰팡이를 보면 사장이 진저리를 치기에 실장은 오늘도 독한 세정제를 사용해서 화장실과 벽을 닦는다.
사장은 현정을 아주 싫어한다. 단지 지숙과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이지만, 사장의 지숙에 대한 배신감은 실장도 익히 알고 있기에 말릴 수도 없다. 결국 사장은 현정을 해고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후임을 구하기 위해 채용공고를 띄웠지만 번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셋이고, 반도체를 전공한 경력 단절 여성인 현주가 지원해서 면접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실장이 보기에도 단정한 외모, 세련된 표준어와 따뜻한 말투, 일하고자 하는 의지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사장은 현주를 더 테스트해보고 싶은지, 처음에는 파트타임 업무를 주고 지켜보았다. 저녁마다 CCTV를 돌려보며 현주가 알아서 열심히 일 하는지, 자리만 지키며 시간을 때우는 건 아닌지 꼼꼼히 체크한다. 사장은 세 시간 동안 엉덩이 한번 떼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현주를 일주일 정도 지켜보더니 정직원으로 채용하기로 결심한다.
실장도 현주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같은 아줌마라서 그런지 이야기도 잘 통하고, 현주의 따뜻한 음성이 위로가 될 때도 많다.
'현주와 함께 일하면 정말 좋겠다!'
실장은 사장의 결정이 오랜만에 아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