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있는 사람들 5
13. 하여튼 여자들은 믿을 게 못 돼
사장은 어릴 때부터 뭐든 열심히 하고 잘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장손이자 장남인 자신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고, 능력도 따라 주었기에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다. 자녀 둘 모두 대학교를 졸업시키고 나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태양광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기업을 다니며 그동안 알아두었던 인맥도 많고, 국가에서 신재생에너지 사업이 활성화 될 것이라는 소스를 알고 있었기에 하루 빨리 사업을 하고 싶었던 사장이다.
사업이 시작될 무렵, 꼴통인 동생이 거지꼴을 하고 사장을 찾아왔다.
“뭐야? 너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거야? 10년동안 연락한번 없더니, 왜 왔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모든 재산을 물려주시면서 동생을 잘 돌봐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기에 늘 애가 쓰인 동생이다. 항상 사고만 치고, 잘못한 줄도 모르고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대들었던 동생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울먹이며 도와달라고 읍소를 하고 있는 동생이 눈앞에 있다.
사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초반 4년 정도는 정말 힘이 들었다. 그래도 함께 해 준 가족들과 직원이 있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결과, 5년차부터 꼴통 같았던 동생이 국가 사업을 하나 둘 따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이 넘쳐나지만, 직원을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구르고 있는 실정이다.
살아오면서 사장은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어봤지만, 지숙이 일 만큼은 타격이 컸다. 정말 믿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뒤통수를 맞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를 배신하고, 도망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생한 지숙에게 늘 고마워하며 특별 보너스는 말할 것도 없고, 연봉도 3년 동안 매번 2배 이상 올려주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지숙이 돈을 가지고 날랐다. 인생을 살며 실패를 거의 해보지 않았던 사장은 그야말로 멘탈붕괴 상태가 되었다. 없어진 돈보다는 지숙이란 사람에 대한 배신감에 더 치가 떨렸다. 7년동안 함께 한 모든 말과 행동들이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때부터 사장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매사에 의심을 하다보니 신경이 예민해져 화와 짜증이 늘었을 뿐 아니라 고혈압은 덤으로 찾아왔다. 여직원에 대한 편견과 트라우마가 생겨 매일 밤 녹화된 CCTV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잠자리에 든다.
오랫만에 마음에 드는 직원이 들어왔다. 하지만 지숙에게 크게 데인 경험이 있는 사장은 몇 주간 아르바이트를 시키며 지켜보기로 한다. 현주는 면접 때 보여준 모습대로 성실하고 강단있게 일을 잘 해낸다. 실장을 시켜 현주의 마음을 떠보기로 한다. 정직원 채용을 하고 싶은데, 내일부터 바로 출근 가능한지 물어보라고. 현주는 엄청 고마워하며 내일부터 가능하다고 답한다. 결정되면 내일 아침 전화 줄 테니 기다리라고 한다.
아침 회의시간.
현정이가 눈치를 보며 할말이 있다고 한다.
“사장님, 저 이번달 말까지만 일할게요. 몸이 좀 안 좋아져서 일을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사장은 현정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요즘 일이 넘쳐나서 사람이 아쉬운데 현정이가 그만 둔다고 얘기하니 짜증이 확 올라온다. 사장은 갑자기 이러면 어쩌냐, 넌 정신이 있는 애냐 없는 애냐, 일 못해도 데리고 있어줬더니 아프다는 핑계로 이렇게 바쁜 때 그만둔다니 어이가 없다 등등. 악담을 마구마구 쏟아낸다. 현정이는 울면서 가슴을 움켜잡더니 아픈척을 해댄다. 사장은 그 꼴갑이 더 짜증이 나서 더 세차게 몰아친다.
갑자기 옆에 있던 지안이가 어떻게 이런말까지 하냐며 사장에게 눈을 치켜뜨고 대든다. 지금까지 했던 욕설들과 행동을 사과하라며 앙칼지게 내뱉는다. 사무실은 현정이의 울음소리, 사장의 고함소리, 지안이의 따지는 소리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 사장은 여직원들의 아우성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지숙의 얼굴만 동동 떠다녔다.
'그래. 여자들은 믿을 게 못 돼. 이렇게 바로 돌아서 버리니'
사장은 화가 나서 내일부터 둘 다 나오지 말라며 고함을 지르고, 회의를 끝내버린다.
실장을 불러 실컷 화풀이한 사장은
"현주도 정직원 취소야!"를 외치고 외근을 나가버린다.
외근을 가던 중 휴게소를 들러 잠시 숨을 고른다. 국가사업 일이 많아져 당장 지안과 현정을 대신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직원들이 퇴사할 때마다 더더욱 사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지만, 그 와중에 지난 번 면접을 봤던 정희의 얼굴이 번뜩 떠오른다. 정희는 얼굴의 표정이 거의 없는 아이였고, 질문에 단답형을 대답만 했지만 다른 사람에 휘둘리지 않고 뚝심 있어 보였다.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출근 가능한지를 물어보라고 했다.
다행히 정희가 출근을 했고, 며칠이 지난 후 실장은 정희가 일을 잘 못한다며 사장에게 볼멘소리를 해댄다. 정희는 국가사업이 뭔지도 모르고, 시스템 업로드를 수차례 설명했지만, 자꾸 서류를 누락시킨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주가 얼마나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지, 성실한지를 계속 이야기하며 정직원으로 채용하자고 부탁한다. 하긴, 매일 밤 보는 CCTV 영상에서도 현주는 딱히 책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래. 현주다! 현주도 정직원으로 채용하자!'
지안과 현정은 퇴사했고, 준호에게도 해고를 통보했다.
사장은 회의시간에 정희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고성이 오가고 사장이 화를 내도 정희의 표정은 변화가 거의 없다. 그리고 사장의 말을 모두 수용하고 오케이를 외친다. 어려운 일을 시켜도 먼저 해보겠다는 정희가 사장은 마음에 들었다. 정희와 현주만으로 팀을 꾸리면 잘 될 것 같다고 사장은 생각한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한 주의 끝, 일요일 오후.
와이프가 갑자기 손을 비비기 시작한다. 주부습진이 있는 손을 비비고 뜯으면…. 무슨 일이 있다는 건데…. 사장은 얼른 말하라고 눈으로 채근한다.
“있잖아요. 저기 그…….”
“뜸 들이지 말고 말해!”
“현주가…. 현주씨가 그만둔다고…. 회사 분위기가 무섭다고 자기와 맞지 않는다네요. 어쩌죠?”
“뭐라고? 꼴값 떨고 있네. 배가 쳐 불렀구만. 하여튼 여자들은 믿을 게 못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