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을 태우는구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봐도.
이제 가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춥지만 그렇다고 겨울이라고 말하기에는 덜 추운 어느 날이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만추'라는 느낌 있는 계절의 한 복판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까만 어둠 속에 한동안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음악다방 '꽃', 스무 살 내가 서있다.
어둠에서 동공이 확장되고 차츰 실내가 뿌옇게 밝아질 때, 쓱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S가 있다.
벌써 약속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그 애를 보니 또다시 부아가 치민다.
안 오면 우리 집 앞에서 밤새도록 기다릴 거라는 읍소를 가장한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나온 자리였다.
S는 국민학교 6학년 동창생인 남자애이다. 사실 국민학교 6학년때는 그 애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
나는 부회장이었고 공부도 꽤 했던 아이였기에 요즘 얘기하는 인싸였다면 그 애는 나의 뇌리에 남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갑자기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러브레터를 우리 집 대문에 던지고 가지를 않나? 그 애의 절친들과 똘똘 뭉쳐서 계속 자신의 존재감을 나에게 어필했다.
나는 전혀 이성적인 감정이 생기지 않았고 뜬금없는 그 애의 애정 공세가 부담을 넘어 짜증으로 치달았다.
사실은 그 애와 단짝이어서 늘 같이 다니며 나와 그 애를 이어주려고 애쓰는 H가 나는 좋았다. 그랬기에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르고 쌍으로 들이대는 그 애들에게 많이 지치고 화가 났다.
그러면서 중, 고등학교 6년의 세월이 그 애들의 등쌀과 집적거림으로 얼룩졌다. 알고 보니 S는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았다. 각종 스포츠에 능숙하고 특히 축구를 잘해서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애가 좋지 않았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이성으로의 설렘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애와 나 사이의 비극이었다.
"진짜, 나에게 그만 연락하라고. 나 남자친구 생겼다고."
자리에 앉자마자 볼멘소리로 퉁명스럽게 내뱉는 나를 보며 특유의 씩 웃음만 짓는다.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 아직 내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한 것이 다 너 때문이야. 왜냐고? 이 좁은 바닥에서 너와 나의 관계를 아는 애들이 나한테 대시를 하겠니?"
사실은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것을 흥분해서 내 입으로 발설했다.
"그러게. 헛된 꿈 꾸지 말고 나한테 정착하면 되지~"
아놔~손 잡는 것을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친다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는 벙어리 냉가슴이 된다.
그때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잔'.
내 속을 태우는구려~를 구성지지만 상큼하게 부르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펄 시스터즈'의 대표곡이다.
이 가사를 들으며 S는 조용히 읊조렸다.
"마치 나 같구먼."
고개를 숙이고 쓴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 애의 실루엣이 너무나 서러웠다.
그때 가슴이 쿵 울리며 처음으로 그 애의 마음이 내 심장에 들어왔다..
'내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일편단심으로 생각해 주다니. 너는 누군가를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는지. 감사함을 잊고 온갖 시건방과 오만을 떨었구나.'
볼멘소리로 쫑알대던 그 입을 다물고 나도 조용히 커피 잔을 들었다.
향으로 먼저 느끼고 입 속으로 음미하며 그 애의 눈빛과 마음을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세모꼴로 치켜뜬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쏘아보는 눈총이 아니라 따스함을 담은 눈길을 보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동글동글해져서 탁자 위를 굴러 다녔다.
"너도 참 대단하다. 얼마나 기다린 거야? 바보처럼."
갑자기 변한 온도에 놀란 그 애는 오히려 당황했다.
"어, 그냥 너 하던 대로 해. 난 그런 너도 좋아."
으이그, 못 산다 정말.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커피 한 잔' 노래를 들으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몇 년째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다가 한 순간에 이렇게 마음이 녹아내릴 수도 있는지 적잖이 당혹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진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그 애와 나눴던 인간적인 교감은 사는 동안 내내 깊은 울림을 주었다.
삶이 버겁고 힘들 때마다 남쪽 바다에 엔터프라이즈가 떠 있다고 생각하라는 그 애의 절절한 마음이 나를 위로했다.
그 애의 사랑을 받아 주지는 못했지만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생각해 준 마음은 가을이면 더 짙어지는 커피 향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