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세동 May 14. 2023

선생님, 그냥 뛰어내리고 싶어요.

차세동의 표면

"선생님, 그냥 뛰어내리고 싶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문장 그대로, 활자가 지니고 있는 덜컥 내려앉는 마음을 그는 매일 마주했다.

 이 문장을 하루에 열 댓 번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창 밖을 바라보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그였다.


 그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맡은 것은 아닐까라는 공포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맥락도, 전조도 없는 당황스럽고도 강력한 문장이었다.



단순히 수업을 나가는 현장을 제외하고

그의 회사에서 수개월을 케어하는 아이들은 한 시즌에 15명 내외이다.

이 친구들은 수개월 동안 일주일에 적게는 한 번, 많게는 세 번, 네 번까지도 그에게 상담을 받는다.

단순히 수업을 나갔던 현장을 더하면 그는 수 천, 수 만명의 청소년, 청년들을 만났겠지만

상담자로서 그들을 만난 숫자는 아직 수 백 명대에 머무른다.


감정도 전염이 된다.

한 시간 정도의 상담이 끝나고 나면 내담자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도가 적지 않게 쌓인다. 물론, 육체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도, 그가 이 일을 싫어하는 것도 전혀 아니다. 선생님, 상담사 등의 직업을 가진 분들이라면 이 형용하기 어려운 피로도를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진이 빠진다..?'에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아니 당연한 것이지만, 그는 스스로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을 때는 상담을 절대 하지 않는다.

청춘들의 아픔을 비교적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지닌 만큼, 그가 아플 때는 그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만큼 '선생님, 그냥 뛰어내리고 싶어요.'라는 문장은 그에게 커다란 준비가 필요한 타격이라는 설명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 많은 상담 경험을 지닌 그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이 지닌 자부심 넘치는 경험이기도 하다.

정말 꽤 나 유명해지지 않는다면 보통의 상담은 유사한 환경에 닫히기 마련이다.

물론, 모든 내담자가 다르고,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지만 상담사는 대개 환경적으로 유사한 내담자만을 만나게 되는 편이다.

가령 학교를 예를 들면 학교에 있는 상담 선생님은 자신이 속한 학교의 학생들만을 만나게 된다.

지역사회에 자리 잡은 상담사 또한 해당 지역, 유사한 환경의 내담자들만을 만나게 된다.

이를 절대 비판할 생각 없다.

오히려 유사한 환경에서 다양한 내담자를 만나는 일 또한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 넘치는 경험이자 지혜일 것이다.

크게 존경하는 바이다.


돌아와서, 그가 지닌 자부심은 청소년들을 국한하여 보았을 때,

그는 그들의 24시간, 모든 현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1:1 상담 및 맞춤형 프로젝트를 만들다 보면 한 명의 청소년에 관계되어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학교 선생님부터 학부모, 기타 어른과 친구들까지. 이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있노라면 한 명의 청소년에 대한 묘사를 듣는 것이 아닌, 다 다른 사람에 대한 묘사를 듣는 듯 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A라는 청소년이

(1). 집에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매사 화가 가득하지만

(2). 학교만 오면 조용하고 말도 없는 것이다.

(3). 그러면서도 동네 친한 사장님에게는 예의바르고 심성이 참 착한 친구다.

그렇다면 이 A라는 친구를 묘사하는 학부모, 학교선생님, 동네 사장님은 놀랍게도 모두 다른 인격체를 묘사하고 있곤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도 A라는 친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 세가지 모습 중 어떤 모습이 진정 A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A라는 친구가 저 세가지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공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를 간과한다.

보통 어른들은 자신이 보는 한 가지 모습에 매몰되어 그 모습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을 탐색하려고 애를 쓰곤 한다. 그러한 탐색을 당하고 있는 청소년의 모습이 때로는 안타깝고 가끔은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답답함은 2년정도 특수교육 현장에 있을 때 극에 달했다. 특수교육 현장에서의 이야기는 기회가 된다면 추후에 다시 다루겠다.

-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그의 위치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그가 지닌 자부심 넘치는 경험이다.

산타 또한 그가 맞다.

그는 때로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청소년들을 만나고,

그는 때로 학교 밖에서 동네 사장님으로 청소년들을 만난다.

그는 때로 학원이나 청소년 기관에서 선생님, 강연자로 청소년들을 만나고,

그는 때로 언제든 부를 수 있는 아는 어른, 편한 형으로 청소년들을 만난다.

그들의 24시간, 그들이 만나는 모든 현장 속에 그는 존재할 수 있다.

그가 비교적 이른 나이, 많은 상담 경험을 지니고 있는 이유이며 그만이 지닌 자부심이 되는 까닭이다.

누구보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기에 그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들의 모든 라이프스타일 속, 차세동이라는 접점이 존재한다.




그렇게 다양한 현장에서 다양한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을 때,

친한 학교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세동아 너의 도움이 필요해'

그렇게 그는 그 학생을 처음 만났다.

다양한 현장에서 다양한 위기청소년들을 만난 그였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그였다.

무기력한 표정, 구부정한 자세.

힘이 없는 목소리와 생기를 잃은 눈동자.

그 학생에게서 의욕을 찾기란 말 그대로 사막에서 바늘찾기에 가까웠다.

몇 회기에 걸친 상담 끝에 알게 되었지만,

그 학생 역시 드라마같은 서사를 지니고 있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아서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서사 끝에 이정도의 무기력과 잃어버린 생기라면 그 학생이 참 대견하기까지 했다.

날이 지날 수록 그 기가 막힌 서사들이 사실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날이 지날 수록 그 기가 막힌 서사들이 새로운 이야기와 함께 끝 없이 이어지는 것에 경악했다.

그 학생과 수 개월, 상담을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함께 했다.

그 학생만을 위한 1:1 프로젝트부터 여행, 캠핑, 대화, 토의, 게임, 꿈과 상상까지

그 학생에게 '자신의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이미 학교, 가정, 그 외의 삶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은 하루에도 열 댓 번 말하고는 했다.

"선생님, 그냥 뛰어내리고 싶어요."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는 그였다.

또한 하루에도 열 댓 번, 그 문장을 듣고 있노라면 그는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느 순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그 또한 동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치유하며, 동료들 또한 그 학생과 대화를 나누며 그의 역할을 함께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차세동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선생님, 그냥 뛰어내리고 싶어요."라는 한 문장은,

도와달라고 비명을 질렀던 스스로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었다는 것.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자신을 상처 내었던 스스로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었다는 것.

-

종종 극단적인 언행을 보이는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극단적인 대처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필수적이고 사소한 것들이 결핍되어 극단적인 언행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한 끼 식사에서 반찬 하나 빼는 것은 그리 화 낼 일이 아니지만,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이에게 반찬 하나, 물 한 모금 빼는 일은 화가 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하루 한 끼라는 너무나 필수적이고 어쩌면 보통의 사람들에게 사소해보이기까지 하는 무언가.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가 곪고 곪아서 극단적인 언행을 낳는 꼴을 본다.

(아, 물론 극단적인 언행의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 또한 가끔 실제로 만나거나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몇 몇 청소년들의 사건사고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보다 함께 분노하는 사람이다.)

-

그 학생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국 그 학생에게 필요한 것 또한 별 것이 아니었다.

언제든 그의 비명을 듣고 '괜찮아'라고 이야기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물론 그 비명이 활자 그대로 지닌 힘 때문에 듣는이를 놀래키곤 했지만 그 뿐이다.

너의 삶이 가치롭다고, 너의 미래를 선명하게 응원한다고.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말해주면 되었던 것이다. 

진심이 가득한 눈빛과 표정도 좋지만, 너의 비명과 목소리를 늘 듣고 있다고 일러주는 것이 그 학생에게는 더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극단적인 문장 속에 사소한 해결책이 들어있던 것이다.

그 학생의 삶 어느 곳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차세동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 누군가 스스로를 해치려는 징조가 보인다면 꼭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차세동 또한 모든 사회안전망을 동원해 만일의 사태를 늘 대비하고 있었답니다.

2. 그 학생의 마지막 연락은 '무소식이 희소식이죠. 잘 지내요 쌤.'이다. 연락하지 좀 되었는데, 글쓰면서 생각난 김에 연락해봐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