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세동 May 15. 2023

나도 당연히 선생님 될 줄 알았지

차세동의 이면


"세동이, 못해도 선생님은 진짜 되겠다."


고등학교 3학년, 내가 들었던 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다.

특히, 그 말이 인상 깊었던 이유를 살펴보자면 나와 주변인의 역사를 잠깐 들춰보아야 한다.




공부에 흥미가 없던 나는 꿈이 없었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그 나이 때 꿈이 있는 것이 더 기이한 것 같다.)

꿈이 없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이 없었고,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따위 해본 적 없는 것이 정확하다.

학교는 짜증 나는 놀이터였고, 가족은 불행한 구치소와 다름없었다.

'차세동 Intro'에서,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을 경험하면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힌 그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문장 또한 기이하다.

꼬맹이 녀석이 갑자기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었다니. 너무 드라마틱한 설정이 아닌가.

드라마틱한 설정이 필요 없는, 나름 드라마틱한 서사가 존재할 뿐이다.


귀여워서 넣었다. 저렇게 어릴 때 게임에 빠진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컴퓨터 게임을 참 좋아했다.

좋아했다는 말은 솔직히 좀 포장했고,

중독에 가까웠다. (아니다 그냥 중독이었다.)


게임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피시방에 충전하는 시간의 규모가 남달랐다.


가족에서의 결핍을 나는 게임에서 채우려 허덕였다.

하지만 게임에 빠지면 빠질수록 가족은 나를 더 게임 밖 현실에 가두기 바빴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가족을 벗어나려 게임으로 도망쳤으나, 게임으로 도망칠수록 가족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부를 시작으로 다양한 재능을 지닌 부모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명의 누나.

그들 사이에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없는 '나'를 살았던 것 같다.

-

한 번은, 학원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피시방에 갔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이전부터 쌓여있던 것이 있었겠지만 그날 나는 집으로 끌려가 정말 많이 맞았다.

그 트라우마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손이 닳도록 빌었던 그 굴욕, 오줌을 지리면서도 수치심 따위 느껴지지 않던 공포.

"너가 기절할 때까지 이건 끝나지 않아"라는 말 한마디가 주는 깜깜한 절망.

그렇게 한 달을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지워졌다.

타의에 의한 은둔형 외톨이. 지워진 30일 정도가 지워지지 않은 채 여전히 나에게 존재감을 뿜어낸다.

-

나를 도울 수 있는 어른들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치이고 날아가 버린 나를 발견하는 어른들이 없었다.

나는, 내가 지를 수 있는 모든 비명을 질렀다.

'들키고 싶은 약봉투'에서 적었던 것처럼, 누군가 '더 적극적이었어야지!'라고 힐난해도 그것이 내가 지를 수 있는 최선의 비명이었다.

선생님도, 주변인도, 가족 그 누구도. 그 비명을 결국 듣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14살의 나는 삶의 동기를 잃어버렸다.

나는 스스로를 상처 냈다. 하지만, 그 상처마저도 '뜯지 마, 보기 흉해'라는 또 다른 상처를 낳았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선택했던 자해 또한 나를 죽였다.

조금 더 나에게 따뜻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만큼은 드라마틱한 서사였다.

그래서 나는, 아픈 아이들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포장된, 세상과 가족들에 대한 분노였다.




당찬 성격의 나는 친구들 앞에서 선언했다.

'나 선생님이 될 거야'

나에게 돌아온 답변의 9할은 '너가?!' 나머지 1할은 '어떻게..?'였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한 문장. '우리 학교 전교 1등 꿈이 선생님이야, 너가 어떻게 해~'이다.

나는 크게 부정하지도,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는가.

구구단도 정확히 외우지 못해 속으로 덧셈을 반복하며 곱셈을 하는 척 연기하는 나였으니 말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따뜻한 마음으로 포장된 분노를 분출하듯, 공부에 열의를 보였다.

물론 '공부하는 척 좀 하지 마', '그렇게 무식하게 공부하면 안 된다.'와 같은 반응은 당연한 값이었다.

방법을 간절히 구하는 나에게 쏟아지는 동정 섞인 비난은 당연한 값보다 더 비싼 덤이었다.


'차세동 Intro'에서 적은 것처럼 나는 고등학교에 올라와 과거의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발견했다.

이 세상에서 나만큼은 어른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깜깜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악습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너무 늦어 도움을 구하는 것조차 죄인 것 같은 친구들을 도왔다.

학교가 끝나면 교실을 빌려 수업을 했고, 학교를 그만 둘 사건에 빠져버린 후배를 내 일처럼 도왔다.

쏟아지는 비웃음과 '너나 잘해!'라는 핀잔은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3년 동안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주변인은 이렇게 평가했다.


"세동이, 못해도 선생님은 진짜 되겠다."

 9할은 '너가?!' 나머지 1할은 '어떻게..?'였던 답이, 드디어 변했다.

하지만 늦어버렸다. 내가 지닌 꿈의 크기가 더 커버린 후였다.

따뜻한 마음으로 포장된 분노를 표출하기에 나는 선생님이라는 자리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나는 장래희망을 적는 칸에 교육감과 교육부 장관을 적었다.

그런 내가 들었던 가장 인상 깊은 한 마디.

"세동아 너 돈 많아? 빽 있어?"

돈도 빽도 없었던 나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해~"

나는 이번에도 역시 크게 부정하지도,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데자뷰를 경험한 나는 잘하면 이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얻었던 것 같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길래 손 모양이...

그렇게 스무 살이 된 나는, 내가 성공했던 입시로 청소년들을 도왔다.

나와 같은 과거를 지닌 사람들도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오히려 과거에 분노했던 세상에 이바지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입시로 청소년들을 돕던 나는 참 잘했다. 낮은 성적으로 소위 높은 네임벨류의 학교를 참 잘 보냈다.

유명세를 타는 것도 금방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느샌가 나의 입은 '너가 어떻게 해!'를 뱉고 나의 눈은 '동정 섞인 비난'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각한 나는 더 이상 입시를 할 수 없었다. 절망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나는 제천, 산속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자원교사생활을 하며 새로운 교육을 만났다.

내가 하고 싶었던 교육이,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과 문화가 그 속에 담겨있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을 잔뜩 안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포장된 분노를 다시 꺼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과 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집념이 결국 나를 비즈니스로 몰았다.

일상을 바꾼 스마트폰, 여가를 바꾼 유튜브와 넷플릭스까지. 세상과 문화를 바꾸는 것은 비즈니스였다.

그렇게 나는 신념과 낭만으로 똘똘 뭉쳐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경영에 대한 지식도, 창업에 대한 기반도 없는 무모하다는 말이 부족한 맨땅의 헤딩이었다.

그렇게 '스타트업을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찾아간 것이 '기훈이'다.

무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던 나의 자랑스러운 고등학교 동창, 기훈이는 막무가내인 나와 함께해 주었다.


그리고는 모교에 찾아갔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과 신념을 가득 담아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었고 학교에서 해당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기 위해 교무실에서 열변을 토했다. 그렇게 나는 끝내 약간의 예산과 15명 정도의 학생들을 허락받았다.

겨울방학,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는 아이들이었다.

2~3달의 겨울방학 동안, 5평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며 그들과 삶을 나누었다.

공부는커녕, 오히려 못하게 하기에 이르렀고 매 순간을 여행, 캠핑, 대화, 꿈, 상상 등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끝났다. 

나는 두려움에 빠졌다.

'학업적으로 중요했을지 모를 그 겨울방학을 내가 날려버린 것은 아닐까?'

'내가 그들의 인생을 망친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서툴렀던 내가 책임지지 못할 허풍만 잔뜩 선물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두려움이 확신이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분명 자퇴하고 싶다고 했던 녀석이 다음 학기, 전교 회장이 되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웃기다)

학교를 다니는 줄도 몰랐다는 녀석이 교무실에서 질문을 하러 온다고 선생님이 전화를 건다.

재능을 펼치지 못했던 녀석이 배우로서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변화를 목격한 나는 이제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

나도 당연히 내가 선생님이 될 줄 알았다.

오히려 비즈니스로 만들어낸 그 변화가 내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이자 문화이며 따뜻함이자 분노였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타트업 창업가로서 자리했을 때 나는 비로소 선생님이 되었다.

나를 부르는 단어는 '대표님', '연사님'보다 압도적으로 '선생님'이 많다.

다양한 현장에서 스승으로서의 삶부터 다양한 무대에서 강연자로서의 삶까지.

내가 되고 싶었던 '선생님'은 역설적인 이름 아래 분명하게 존재했다.



1. 집으로 끌려가 많이 맞았던 순간은 지금까지도 '체벌 절대 금지'라는 나의 굳건한 신념이 되었다.

2. 가족들과의 관계, 지금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나쁜가?) 그 사이 많은 서사가 있지만 아직 그 모든 서사를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스스로 준비가 되지 못했다. 어쨌든 그들이 비난받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하다.

3. 종종 만나는 아이들 중 유독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 있다. 솔직히 나는 마음 한편 부러움을 느낀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어려운 가정에게 괜히 더 마음이 쓰이는 이유이다.

이전 04화 선생님, 그냥 뛰어내리고 싶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